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내셔널리즘 (문단 편집) ==== 비판론 (‘한계가 역력하다’ 측) ==== || {{{#!wiki style="margin: -26px -10px -5px" [[파일:external/www.catch21.co.uk/nationalism1.jpg|width=100%]]}}} || || '''"내셔널리즘은 유아퇴행적 질병이다. 이는 인류가 앓는 홍역이다."''' -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정확한 원문은 'It is quite possible, to be both. I look upon myself as a man. Nationalism is an infantile disease. It is the measles of mankind.' saturday evening post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발언.] || || {{{#!wiki style="margin: -5px -10px -5px" [youtube(-Ew8rVQyND8)]}}} || || '''[[나치 독일]]의 선전부 장관 [[파울 요제프 괴벨스]]의 총력전 연설'''[* [[스탈린그라드 전투|패전의 위기]]를 역이용해 민족이 위험에 처했다며, 국가의 결집과 전쟁 여론 동요를 꾀하는 민족주의가 [[전체주의]] 및 [[파시즘]]과 결합했을 때의 위험성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장면이다.] || >'''그러나 오늘의 인간 사회를 더욱 공평하게 하고 인류의 상호 유대를 더욱 완전하게, 더욱 튼튼하게 하려는 데에 또 하나의 장애가 있다. 민족주의와[* 이탈리아어 회칙에서 nazionalismo라 되어있다. 민족주의냐 내셔널리즘이냐로 한국어 번역 논쟁이 있을지 모르겠으나, 한국천주교주교회의 홈페이지에서 민족주의라 번역했으므로 존중 차원에서 그대로 놔뒀다.] 인종 차별주의가 그것이다. 최근에 비로소 정치적으로 독립한 민족들이 방금 얻은 민족의 통일이 아직 견고하지 못하므로 통일을 보호하려고 온갖 노력을 다하는 것도, 옛 문화를 지닌 민족들이 조상들에게서 물려받은 유산을 자랑하는 것도 극히 자연스럽기는 하나, 정당한 이 감정도 전인류를 감싸주는 보편적 사랑으로 더욱 완전해져야 할 것이다. 민족주의는 민족들을 고립시키므로 민족의 참된 이익을 잃게 한다. 특히 국가 경제가 매우 빈약해서, 발전 계획을 실천하려거나 상업적, 문화적 교류를 증진시키며 강화하려면 서로의 모든 노력과 지식과 자금을 집결시켜야 할 국가들에 있어서는 민족주의가 말할 수 없이 해로운 것이다.'''[* [[https://w2.vatican.va/content/paul-vi/it/encyclicals/documents/hf_p-vi_enc_26031967_populorum.html|이탈리아어 회칙]]: Altri ostacoli si oppongono alla edificazione di un mondo più giusto e più strutturato secondo una solidarietà universale: intendiamo parlare del nazionalismo e del razzismo. È naturale che delle comunità da poco pervenute all’indipendenza politica siano gelose di una unità nazionale ancora fragile, e si preoccupino di proteggerla. È pure normale che nazioni di vecchia cultura siano fiere del patrimonio, che hanno avuto in retaggio dalla loro storia. Ma tali sentimenti legittimi devono essere sublimati dalla carità universale che abbraccia tutti i membri della famiglia umana. Il nazionalismo isola i popoli contro il loro vero bene; e risulterebbe particolarmente dannoso là dove la fragilità delle economie nazionali esige invece la messa in comune degli sforzi, delle conoscenze e dei mezzi finanziari, onde realizzare i programmi di sviluppo e intensificare gli scambi commerciali e culturali.] >---- > 교황 성 바오로 6세 회칙 [[https://archive.ph/KLKqg|「민족들의 발전{{{-2 (POPULORUM PROGRESSIO)}}}」]], 1967. 3. 26. 민족주의는 본질적으로 온갖 종류의 극단주의로 이어지기 쉬운 사상이다. 역사적으로도 민족주의는 [[전체주의]], [[쇼비니즘]], 전쟁과 뗄 수 없는 관계였다. 이는 근대사 전반이 입증하며, 가장 과격한 사례는 20세기의 2차대전이었다. 21세기에도 무수한 나라들이 민족주의를 동원해 이웃 국가와 분쟁을 일으킨다. 이렇듯 권력층이 민족주의로 자국민들을 세뇌한 경우가 많지만, 반대로 대중이 스스로 민족주의의 광기에 빠진 사례도 많다. 예컨데 [[게르만족|게르만 민족]]의 우월성을 강조하며 [[유대인]]을 학살한 [[나치]]가 대표적이다. 그래서 현대 서구권에서는 내셔널리스트란 단어 자체가 기본적으로 부정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이는 20세기 전반부 서구권의 역사가 민족주의로 인한 과오의 역사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존 민족주의의 대안으로 21세기에는 국경을 초월한 '''열린''' 민족주의가 제시된다. 이러한 담론들은 주로 서구권에서 활발하다. 미국에서는 민족과 인종을 초월한 국민주의가, 유럽에서는 친 EU 성향의 유로내셔널리즘이, 아랍에서는 부족을 초월한 [[아랍 민족주의]]가 논의되고 있다. 그러나 [[반민족주의]] 진영에서는 열린 민족주의나 이타적 민족주의의 개념에도 비판적이다. 이런 방식의 민족주의도 근본적으로 '''"우리 민족 ≠ 다른 민족"''' 이라는 사고방식은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게 민족에 따라 집단을 나누는 사고방식을 버리지 않는 한, 민족으로 구분된 집단 간에 배타성과 폭력성으로 귀결된다는 것이 반민족주의자들의 주장이다. 실제로 앞서 언급한 아랍 민족주의는 이슬람 극단주의와, 유로 내셔널리즘은 포퓰리즘적 극우주의와 결합하며 부작용을 드러내고 있다. 보다 회의적인 반민족주의자들은, '이타적이거나 열려있는' 민족주의는 존재할 수가 없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열린 민족주의나 이타적 민족주의는 모두 민족주의 진영의 기만적인 자기포장에 불과하다고 비판한다. 하지만 반민족주의나 열린 민족주의 담론도 서구권 외의 지역에서는 힘을 쓰지 못한다. 그 외의 지역에서는 여전히 민족주의의 영향력이 압도적으로 강하다. [[중동]], [[동남아]], [[동북아]]를 포괄한 아시아 대륙이 민족주의 성향이 강한 대표적인 지역이다. 해당 지역에서는 아예 극우적이거나 파시스트적인 주장들도 폭넓은 지지를 받는 경우가 흔하다. 물론, 서구권에도 민족주의자들은 있지만, 그에 못지 않게 민족주의에 대한 경각심도 높다. 그러나 아시아에서는 민족주의가 내포한 문제점들을 아예 인지조차 못하고 맹목적으로 민족주의를 찬양하는 경우가 많다. 대표적으로, 한중일로 대표되는 동북아 지역에서는 역사 해석에 있어서 객관적 관점보다는 민족주의적 관점이 우선시되고, '투철한 민족주의자'라는 말은 부정적인 어감보다는 긍정적인 뉘앙스가 강하다. 동북아는 21세기 들어 민족주의와 그로 인한 정치적 갈등이 극심한 대표적인 지역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해당 지역의 경제력과 국제적 영향력이 21세기 들어 급격히 팽창했다. 이는 해당 지역의 나라들에 그동안 억눌려있던 민족주의적 열망을 표출하고 영향력을 과시할 기회를 주었다. 다음, 아시아에서는 과거사 문제와 패권 경쟁이 현재 진행 중이다. 이런 민족 및 국가 간 갈등 속에서 각국 수뇌부는 국민들의 결집을 위한 도구로 민족주의를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중국은 동북아 삼국 중에서 중화민족주의적 패권주의적 성향이 심한 곳이고, 일본도 일본제국은 물론 일본의 우경화로 도로 민족주의가 강해지는 추세이다. 한국도 국력의 한계로 인해 패권주의를 추구하지만 않았을 뿐, 좌우진영 모두 순혈주의적 민족주의를 줄기차게 강조해왔다. 중동 및 서아시아 지역에서도 종교 극단주의 못지 않게 극단적 민족주의의 영향력이 강하다. 이는 세속주의 진영은 이슬람 극단주의에 맞서 국민들을 결집시킬 도구로 민족주의를 앞세우고, 부패한 정부 역시 국민들의 불만을 억누를 도구로 민족주의를 이용하기 때문이다. 해당 지역에서는 이슬람교 말고는 국민들을 결집시킬 도구가 민족주의 밖에 없기도 하다. 이는 해당 지역이 경제적으로 매우 낙후된데다 사회적 억압이 만연해있기 때문이다. 이 지역의 민족주의자들은 인류의 보편적인 가치라 할 수 있는 인권, 평등, 자유 등의 가치조차 서구적 색채로 규정지어 배척한다. 왕실을 비롯한 지배층도 자신들의 부패를 국민들이 인식하지 못하도록 민족주의를 열심히 써먹고 있다. [[북한/이념#s-4|북한의 민족주의]]는 민족주의의 부정적인 측면이 극대화된 형태이다. 이는 통치 세력이 체제의 부당함을 숨기기 위한 수단으로 민족주의적 세뇌를 적극적으로 이용하기 때문이다. 북한은 민족주의의 '이기성 및 폐쇄성'을 극대화시키고, '자기연민'을 충족시키는데 동원하며, [[피해자 코스프레]]뿐만 아니라 [[인종주의]]와 [[순혈주의]]까지 지녔다. 이러한 극단적인 민족주의는 남한에 대해서 북한의 '정통성'을 강조하는데 쓰인다. 국가의 정통성 고취를 위해 신화 속 인물인 단군의 가짜 [[단군릉]]을 만들어서 역사왜곡을 하는 것이 대표적이다. 외국에 대한 적개심 배양을 위해서도 역사왜곡을 서슴지 않는다. [[신천·재령군 봉기|신천군 사건]]을 미군에 의한 신천대학살이라고 왜곡하여 미국에 대한 증오심을 고취시키거나, [[납북 일본인]] 문제를 [[일본군 위안부]]에 대한 정당한 복수로 주장하고, [[조총련]]계 [[재일 조선인]]교포들을 '째뽀'라고 부르면서 경멸하고 차별한다. 또한 한국사회에 대한 [[우리민족끼리]] 프로파간다를 펼친다. 또한, [[학문]]적 연구에서도 이 민족주의로 인해 객관적이고 이성적인 판단을 제대로 하지 못하게 된다는 문제점이 있다. 한국의 경우, 고대사 및 고대 언어 연구와 관련하여 한민족 또는 한민족이라 생각되는 것들에 대해 모두 '한국계' 및 '한국어족(언어적 계통에 관한 것)'이라는 꼬리표를 달곤 한다. 대표적으로 [[가야]]의 언어와 관련해서도 한반도 내뿐 아니라 중국과 일본을 포함한 주변 언어들에 대한 광범위한 조사를 하여 언어적 분포 양상을 살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와 같은 과정을 생략하고 턱없이 부족한 자료만 갖고서 '가야는 수백 년 동안 삼국과 함께하였으니 이들의 언어는 고대 한국어 계통으로 보아야 한다'라는 당위성을 내비치기도 한다.[* 한 언어의 계통을 논하는 것은 실제로는 매우 복잡하고 까다롭다. 주변 언어들에서 차용한 표현은 아닌지 검증하는 것이 필요하고 매우 객관적이고 공정한 연구 자세가 필요하다. 이러니 국내에서는 제대로 된 연구 성과가 사실상 없다시피하다.] 이렇게 따지면 한국은 1000년이 넘도록 중국의 영향 하에 있었으니 중화민족의 국가로 보아도 논리상 할 말이 없어지며, 또한 이는 현재도 중국 내에서 [[중국티베트어족]]이 아닌 언어들이 소수 민족의 언어로 쓰이는 등 (한국에서 이야기하는) 민족적 차원에서 논의할 사항을 벗어나는 현상이 일어난다는 점을 간과한 것이다. 객관적으로 수집한 자료가 적을 때에는 이와 같은 귀속에 대해 '모른다'라고 답해야 함에도 민족주의적 감정으로 인해 팔이 안으로 굽는 현상이 21세기인 오늘날까지도 심심찮게 보인다. 이는 비단 한국뿐 아니라 중국, 일본 모두 나타나는 문제점이다. 결국 한국, 넓게는 동아시아가 자신들의 고대사적 분야들의 연구와 관련하여 세계적으로 지평을 열기 위해서는 민족주의부터 최소한 학문적 차원에서만큼은 타파할 필요가 있다. 유럽의 민족주의를 심화시킨 [[프랑스 대혁명]]의 [[장 바티스트 베르나도트|주요 인물]]이 [[베르나도테 왕조|아예 원래 조국을 떠나고 새로운 조국의 국부가 된 사례]]도 있다. 이미 여기서부터 모순된 사례를 보여준다. 내셔널리즘은 태생적으로 집단의 공통점을 추구하기에, 하나의 집단을 구성하는 각양각색의 사람들을 천편일률적인 몇 가지 기준으로 정의하려는 경향성을 나타내며, 이는 자연스럽게 그러한 기준, 즉 '''민족성'''에서 벗어나는 모든 가치를 억압하는 방향으로 악용될 가능성이 크다. 그뿐만 아니라 과도한 내셔널리즘에 기반한 사고방식은 [[비뚤어진 애국심|국가에 대한 맹목적인 충성을 요구]]하는 [[국수주의]]나 [[전체주의]]로 변질할 위험성이 있다. 물론 이처럼 극단적인 이데올로기가 주변 국가들은 물론이고 결과적으로 자국민 혹은 자민족에도 불행을 가져온다는 사실은 이미 지난 [[20세기|한 세기]] 동안 [[제2차 세계 대전|전 세계가]]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수많은 희생을]] [[냉전|통해 체득한]] [[베를린 장벽|바 있다]].[[반미]]-[[반일]]-반[[제국주의]] 논리를 버무려서 [[인민]] 세뇌에 써먹고 있는 [[중국]]도 가까운 예이다. 또한 [[다민족]] 국가에서는 단결이 아닌 골칫거리 중의 하나이다. 조율을 제대로 못 할 경우 [[내전]]으로 치닫게 되어 [[국가 막장 테크]]로 가는 경우도 있고, [[제노사이드]] 혹은 그에 준하는 대규모 [[학살]]이 벌어져 그 국가에 대한 국제 여론이 매우 나빠질 수 있다. 대표적인 예가 후투족과 투치족이 내전을 벌여 수십 만명이 죽어 나간 [[르완다 내전]], 다수민족 버마인과 로힝야, 카친, 카렌, 샨족등 소수민족과의 충돌과 대립이 이어지고 있는 [[미얀마]], 7개[* 코소보를 국가로 포함했을 경우. 포함하지 않았을 경우 6개.]의 국가로 분열한 [[유고슬라비아]] 등이 있다. 현대의 중국 또한 자국 내의 민족 분규를 해결하는 데 '55개의 민족[* 자세히 알아보면 부족에 가까운 개념이다. [[중화민족]]이야말로 진정한 (다른 국가에서 보편적 의미로 쓰는)민족이라는 것이다.]이 화합하여 만들어내는 [[중화민족]]'의 개념을 창작하여 [[티베트]], [[위구르]] 문제 등을 강압적으로 해결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내셔널리즘이 강성해질수록 그 민족의 근간이 되는 [[역사]]를 '민족의 역사'라는 하나의 줄기로 묶어내려는 경향이 강해지는데, 문제는 현대 민족국가들 대다수가 근대에 형성된 것이므로 근대 국가와 민족 관념을 자꾸 고대사로 확장, 투영시킴으로써 그 '''역사에 대한 소유권'''과 정당성을 찾으려 한다는 점이다. 민족을 초역사적 실체로 보지 않는 이상 이런 태도는 역사학 연구에서 지양해야 할 태도이며, 그 저변에는 대개 정치적 의도가 깔려 있다. [[중국]]이 그 대표주자로서, 애초에 한족이란 개념부터가 한이란 이름에서 보이듯 서로 다른 나라나 다름없었던 춘추전국시대를 끝장낸 진나라의 강력한 통일정책이 한나라로 이어지면서 생긴 민족개념이다. 그 외 [[동북공정]] 문제와 [[고구려]], [[발해]] 역사가 한국 역사냐, 중국 역사냐[* 근래에는 [[백제]] 역사에서도 소유권을 주장하려는 움직임이 있기도 했다.[[https://www.yna.co.kr/view/AKR20170912183700005|#]]] 따위의 소위 역사 분쟁은 이미 한국 사회에도 익히 알려진 바 있다. 물론 한국 사학계도 이에 대해 '[[수나라|수]], [[당(통일왕조)|당]]에 대한 고구려의 승리는 민족의 방파제 역할을 한 것' 등 내셔널리즘이 도구로써 활발히 사용하고 있다. 이것도 민족을 정의하는 관점에 따라 "저런 놈들과 같은 수준에서 진흙탕 싸움을 하면 안 된다"[* 일례로, [[박노자]]는 고대 역사에 현대의 국가나 민족이란 개념을 대입해서는 안 된다고 지적한 바 있다. 과연 고구려인들이 신라인들을 같은 민족이라고 생각했을까? 아니, 애초에 당시 고구려, 백제, 신라인들에게 '하나의 민족'이란 개념이 있었을까? 예컨대, 삼국통일 당시 신라 입장에서는 결국 고구려나 백제나 당나라나 다 외국이자 견제 대상에 불과했다는 말이다. [[http://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30564|참고할만한 기사.]] 하지만 최소한 고려시대 이후로는 삼국이 자신들과 동일한 민족이라는 개념이 생겼다. 당대의 중국 쪽 기록을 봐도 당시 중국의 왕조들도 고려와 조선을 고구려의 후신 국가로 여기는 발언들이 다수 등장한다. 그리고 삼국시대 당시에도 삼한이라는 표현이 사용되었음은 물론 삼국통일도 삼한일통이라고 일컬었다는 점으로 미루어 볼 때, 고구려·백제·신라 삼국 국가들은 자신들끼리를 그 외의 국가보다 가깝게 봤다고 할 수 있다.]라는 주장과 "그렇다고 한민족의 역사를 강탈하려는 시도를 좌시하면 안 된다"는 주장이 대립하고 있다. 한때 상당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던 [[자본주의 맹아론]]과 [[식민지 근대화론]]을 둘러싼 담론 또한 한국사학계에서 내셔널리즘과 근대가 갖는 위상이 어땠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자세한 내용은 각 문서 참고. 또한 옹호론에서는 통일 전 독일을 "수백 년간 주위 열강들에 의해 분열된 채 변방으로 취급받던" 지역이라 저평가하고 있지만, 정치적 강대국으로서의 통일 독일이 19세기에 태어났을지 몰라도 그 이전의 독일이 질(質)적으로 낙후된 지역은 아니었다. 오히려 독일의 식자층은 독일의 힘이 다양성에서 나온다고 보았다. >그러니까 독일이라는 개념은 교양계층의 머리 속에서 생겨난 것으로, 직접적인 정치적 연관성이 없는 순수한 문화국가의 의미를 띠고 있었다. 이렇게 보면, 영국이나 프랑스의 경우처럼 왕들이나 전쟁영웅들이 아니라 수많은 시인과 사상가들이 국가의 구심점을 형성했던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물론 '상수시'(Sanssouci)궁의 철학자'로 불리워진 프리드리히 대왕은 하나의 예외였다. 영국인들에게는 왕과 런던이, 프랑스인들에게는 나폴레옹과 파리가 국가의 중심이었다면 독일인들의 경우에는 괴테와 바이마르가 국가의 중심이었다. 하지만 독일인들은 독일의 정치적 분열을 부담으로 느끼지는 않았다. 비록 휴머니즘 시기 이후 그러한 정치적 분열이 가끔 불평과 한탄의 대상이 되기는 했지만, 그것을 치유하는 방책은 프랑스와 영국의 경우처럼 단일한 민족국가를 형성하는 것이 아니라 제후들 사이의 제휴를 더 강화시키고 보다 강력하게 황제를 밀어주자는 것이었다. 사람들이 나쁘다고 여긴 것은 제국의 분열이 아니라 통치자들의 에고이즘이었다. 통치자 및 궁정의 다양성과 제국의 기본체제는 오히려 장점으로 간주되었다. 빌란트(Wieland, 1773~1813)는 이러한 생각을 요약하여 독일의 다양성은 전제군주적 권력행사에 제동을 걸며, 도덕과 풍습의 자연스러운 다양성은 물론이고 극장이나 대학에 다양한 문화나 인문주의 정신을 촉진시키며, 나아가서는 국가 전체의 부가 한곳에 집중되어 있는 나라들에 비해 국가의 부를 골고루 배분시킬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심지어 쉴러와 빌헬름 폰 훔볼트는 독일을 문화적 전성기를 구가하는 새로운 그리스라고 명명하면서 독일은 힘은 없지만 사상이 풍부한 나라라고 말하였다. 이에 비해 헤게모니를 추구하고, 고도로 조직화되고 문명화되었지만 독일인들이 그렇게 자긍심을 갖고 있던 독일적 문화는 없는 나라―이러한 새로운 로마가 곧 프랑스였다. >---- >- 하겐 슐체{{{-2 (Hagen Schulze)}}} 지음, 반성완 옮김, 『새로 쓴 독일 역사{{{-2 (''Kline Deutsche Geschichte'')}}}』, 서울, 知와 사랑, 2000, 104쪽 비슷하게, 민족주의의 부재가 국력을 약화시켰다고 오해 받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경우, 오히려 말년에 보편주의를 버리고 게르만 민족주의를 선택했기에 무너졌다고 평가된다. 슬라브민족주의가 제국을 찢은 것이 아니라 게르만민족주의를 택한 제국이 스스로를 찢은 것이며, "제국의 백성들이 통치 엘리트들에 대한 믿음을 버린 것이 아니라, 그 반대였다."{{{-2 (로렌스 콜)}}} 게다가 20세기 초 세르비아 민족주의의 피해의식과 고토회복주의는 (비록 전적으로 세르비아탓만을 할 순 없지만) 1차 대전이라는 참사를 불렀으며, 이후 [[유고슬라비아]] 내부의 민족갈등은 [[유고 내전]]을 불렀다. [[포클랜드 전쟁]]을 일으켰던 [[아르헨티나]]의 독재자, [[레오폴도 갈티에리]]의 경우도 있다. 아르헨티나는 [[후안 페론]] 사후에 1년이 머다하고 끝없이 이어지는 [[쿠데타]]로 엉망이 되어있었다. 1981년 상황을 보면 실업률이 13%에, 인플레이션이 130%였다. 아르헨티나 광장에서는 매일 시위대가 들끓었고 각 주요 도시에서는 격렬한 데모가 벌어졌었다. 그러나 포클랜드 전쟁을 일으키고 나서, 갈티에리는 지지율이 50~60%로 훌쩍 뛰어오른다. 당시 아르헨티나엔 환호성을 지르는 사람들도 넘쳐났다고 한다. 비록 참패하고 국민이 실망하기 전까지였지만 말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