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남제서 (문단 편집) == 의의와 평가 == 『남제서』는 양나라 때 찬술된 까닭과 편찬자 소자현이 종실의 구성원이기 때문에 사서에 주관적인 입장이 내재되어 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예를 들어 할아버지 고제의 등극이 아름다운 선양 과정으로 미화되어 있는가 하면, 아버지 예장왕 소억(蕭?)의 활동이 극찬된 것은 소자현의 가치가 개입되어 있다고 볼 수 있는 좋은 대목이다. 하지만, 양무제와 그의 부친 소순지의 이름을 냉정히 [[피휘]](避諱) 한 점을 미루어 보아 소자현도 양의 신하로서 자세를 지키고 있다. --그야, 자칫 피휘를 안 했다가는 자기 목숨이 위태로워질 수도 있으니 당연하다.-- 또한, 제나라 말기 동혼후(東昏侯)의 폭정, 사치, 살육 등의 묘사를 적나라하게 하여 제나라가 망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논찬에서 밝히고 있다. 이것은 어찌보면 남제의 멸망을 애석한 심정으로 집필한 것일 수도 있지만, 적어도 편협한 사고로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는 점은 분명하다. 소자현은 동시대의 목격자로서 풍부한 자료를 바탕으로 역사를 저술할 수 있었다. 그런 연유로 『남제서』는 사료가 비교적 충실한 편이며, 객관적인 인식과 가치판단을 고결한 문체로 잘 표현한 역사서이다. 심약과 소자현은 동시대 인물로 비슷한 삶을 살았기 때문에 이는 곧 『송서』와 『남제서』가 비교되곤 한다. 두 사람 모두 유사한 직업과 지위를 갖고 있었기에 남조의 문벌체제 호평이나 유불교를 함께 수용하는 종교 관념 등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지의 체례도 「식화지(食貨志)」와 「예문지(藝文志)」가 빠진 것을 제외하면 『송서』와 거의 똑같다. 단 서술 방식에서 차이가 드러나는데 『송서』는 예와 제도 등의 연원을 [[한나라]], [[위(삼국시대)|위나라]] 시대 또는 [[진(사마씨)|진나라]] 시대까지 서술하는 경향이 있는가하면, 『남제서』는 철저히 제나라의 상황과 변화에만 초점을 두어 정리했는데, 두 사서 중 『남제서』가 더욱 치밀하다는 평가를 받고있다. 종족집단의 통치에 대해서 『송서』보다 세세하게 풀어썼다. 열전편에서는 『송서』와 극명하게 쌍방을 이룬다. 『남제서』는 똑같은 유형의 인물을 전(傳)으로 편제하는 유서법을 채택하고 있지만, 『송서』는 대서법을 택하여 이루어져 있다. 청의 고증학자 조익(趙翼)은 『이십이사차기』에서 『남제서』는 과학기술자나 의술인 혹은 수절(守節)로 유명한 사람 등 특수한 부류의 인물들은 한 열전에 나열하여 더 많은 인물들을 포함할 수 있게 되었다고 칭찬하고 있다. 이를테면, 「심문계전(沈文季傳)」에서 당우지의 반란을 상세하게 기록한 점이나 「경릉문선왕자량전(竟陵文宣王子良傳)」에서 조세와 부역의 포, 건설, 개간 등에 대한 내용이 방대한 점 등을 비추어 볼 때 『남제서』는 사료적 가치가 크다고 할 수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