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남인 (문단 편집) ==== 복귀를 위한 근왕 노선 ==== [[경종(조선)|경종]]은 자신의 즉위를 반대했던 노론을 제거하려고 했고 결국 [[신임옥사]]로 노론을 작살내버리고 소론 정권을 세웠다. 그와 함께 소론 중에서도 준소(강경파)와 관계가 깊었던 남인들도 대거 조정에 진출하게 된다. 그러나 그 기간은 얼마 가지 않았다. 결국 경종이 승하하고 [[영조]]가 즉위하게 되자 다시 실각한 준소 - 탁남의 주도로 [[이인좌의 난]]이 터졌다. 그러나 난은 진압되었고, 이를 기념하여 평영남비(平嶺南碑)가 세워졌으며, 경북 상주 목사, 경기도 도사 출신 전라감사 정사효가 남은 세력들을 다시 모아 재기를 도모했으나 실패하고, 영조 31년의 [[나주 괘서 사건]]과 연이은 과거 시험장 답안지 문제로 집단 자결 수준으로 대들다가 준소도 궤멸된다. [[이인좌의 난]]으로 남인 지역인 영남은 "[[반역향]]"으로 낙인찍히고, 이 지역의 남인들은 벼슬길이 막히게 된다.[* 다만 그게 아니더라도 원래 숙종시기로 접어들며 점점 수도권 출신들이 벼슬을 독점하는 현상이 벌어지긴 했다.] 심지어 이인좌의 난 토벌에 적극 동참한 영남 출신 의병이 많았음에도 말이다. 이로써 영남 출신 남인들은 다수가 재야로 잠적하게 된다. 이로서 남인은 반란에 가담하지 않은 [[채제공]] 일파의 청남만[* 앞서 나온 이인좌의 난 등의 남인들은 모두 탁남이다. 채제공 자신도 노론이 남인을 공격하자 이에 무신난(이인좌의 난) 등을 일으킨 자들은 탁남의 자손인데 왜 우리를 욕하냐고 반박했다.] [[정조(조선)|정조]] 대에 잠깐 나오고 끝난다. 정조 때 [[http://sillok.history.go.kr/id/kva_11212026_001|# 영의정을 맡은 채제공은 남인의 역사를 이와 같이 변호하고 있다]]. 채제공은 숙종 때 숙청 된 허적, 허견 등의 남인은 물론 [[김일경]] 무리와 [[이인좌의 난]]에 가담한 것도 모두 탁남들이며 자신들은 일체 연관 없는 청남이라고 못 박고 있다. 즉, 당파로서의 남인은 청남만 남았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그나마도, 채제공과 정약용 집안을 보듯 기호남인이었다. 그나마 살아남은 것이 영조와 정조에 의해 중용된 영남 남인의 본산인 [[양동마을]]의 [[이언적]] 후손들과 기호 남인의 [[채제공]] 등이었다.[* 채제공은 [[사도세자]]의 측근으로, 이미 영조 시절 승지와 대사헌, 대사간과 여러 판서(병조, 예조, 형조, 이조)를 역임했다. 처음에 폐세자가 거론 될때 극력으로 막았기에 노년의 영조에게 “진실로 나의 사심없는 신하이고 너([[정조(조선)|정조]])의 충신이다.”라는 말도 들었다. ([[사도세자]]가 사사당할 때는 모친상으로 시골에 내려가 있었다.)] 영조와 정조는 왕권 강화를 위해 <대학>의 명덕(明德) 개념에 천착했고, 이와 관련해서 선구적 업적을 남긴 "선정신"이자 [[문묘]] 및 [[종묘]] 동시 배향 6현 [[이언적]]을 재차 주목하게 된다. 이언적 덕분에 영남 남인으로서는 거의 드물게 이 시대에만 양동 마을 출신 4명이 2품 이상의 고위 관직자가 된다. [[사도세자]]가 죽고 [[정조(조선)|정조]]가 영조의 뒤를 이어 즉위하면서 남인은 정계에 복귀하기 시작했다. 남인인 채제공 등의 복귀에 노론 [[벽파]]와 완소이면서 벽파와 행동을 같이한 [[서명선]] 등이 손을 잡고 격렬하게 탄핵하였고 서명선은 아예 "저놈이 [[역적]]이 아니면 제가 역적입니다!"라고 선언하기에 일렀지만, 정조가 탕평파의 옛 수장 김재로의 아들 시파 김치인을 영상으로 중용하여 중재에 나서자 채제공과 남인 세력은 한 세력으로서 자리를 잡게 된다. [[시전]]의 독점을 철폐한 신해통공이 그의 업적이다. [[채제공]]은 [[사도세자]] 추숭을 적극적으로 밀고 나섬으로 당시 조정의 절대 다수였던 [[노론]]을 죄인으로 은글슬쩍 몰아붙혀 실각시킨 다음 남인 정권을 세울 궁리를 했고, 이는 여려차례 벌어진 [[영남 만인소]] 등으로 구체화되었다. 이 때문에 노론 [[벽파]]의 지속적인 견제를 받았는데, 채제공이 죽을 때가 다 되었음에도 그의 후계자인 이가환 등은 [[이단#s-1|이단]] 신봉자 등으로 낙인 찍혀 구심점이 될 만한 인물로 성장하지 못했던 것도 노론의 지속적인 견제가 원인이었다. 무엇보다 정치에서 밀려난 남인들이 서학([[천주교]])에 상당히 심취하게 되었던 것이 복귀 후 재성장을 가로막은 결정적 원인이었다. 정조 때 남인은 공서파와 신서파로 나뉘며, 신서파가 서학([[천주교]])와 연관이 있었다. 천주교와의 연관은 정조 시기엔 어느 정도 용서를 받았으나, 정조 사후 순조가 즉위하자 집권한 벽파에게 용납되지 않았다. 결국 1801년 [[신유박해]]로 [[이가환]], [[이승훈 베드로|이승훈]], 정약종, 권일신 등의 목이 한꺼번에 날아가며 남인(특히 기호남인)은 대 타격을 입었다.[* [[충청도]] 일대와 [[경기도]] 일대에 [[천주교]] [[순교]] [[성지]]가 많은 이유이기도 하다. 기호 남인이 [[신유박해]] 때 주르륵 순교한 데다가, 이후에도 [[새남터 성지|새남터]], [[절두산]], [[해미읍성]] 등지로 끌고 와서 처형했기 때문이다.] 한편 남인의 공서파들 중 강경한 이기경, 목만중, 홍낙안도 남인이면서 천주학을 못마땅하게 여겨 벽파와 동조하여 신유박해때 신서파들을 강경탄압하였다. 이들이 신유박해에 동조하여 사람들이 노론벽파라고 오해하지만 이들은 남인이였다. 이기경은 남인이였던 정약용과 친우였다가 천주학의 견해 차이로 같은 남인이면서도 서로 정적이 되었고 목만중의 가문인 사천 목씨는 가문이 당파가 남인이였다. 홍낙안도 채제공의 조카로 진산사건때 천주교를 믿는 권철신과 이승훈의 경위를 채제공에게 고하여 그들이 문초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