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남인 (문단 편집) ==== 남인들의 재집권과 [[갑술환국]] ==== 이 시기에 남인의 지도부 중진들은 대부분 외척 장희재의 후원을 받는 민암, 유명현, 유명천, 이의징 일파였다. 특히 갑술환국 직전에는 민암이 1691년에 우의정으로 승진했다. 남인의 지도부는 민암 우위로 다 재편되었고 이담명, 이서우마저도 민암 일파로 전향하면서 민암 일파가 남인의 다수를 점했다. 그리고 또 병권과 군권과 경찰권도 대부분 민암과 장희재 일파가 쥐고 있었다. 민암은 남인 재집권기에 병조판서를 역임한 적이 있고 장희재는 좌포도대장, 총융사 등을 지냈으므로 민암과 장희재 일파가 병권과 군권을 쥐는 것은 당연했다. 그 뿐 아니라 오시복이 수어사로 있었고, 이의징이 훈련대장으로 있었고, 황징이 어영대장으로 있었는데 이들은 모두 민암과 장희재의 사람들이었고 이의징이 어영대장을 역임하기도 했으므로 군권이 민암, 장희재의 손아귀에 들어오는 것은 당연했다. 그리고 민암 외의 병조판서인 윤심, 민종도도 민암의 일파였고 민암의 후임 병조판서인 목창명도 민암의 일파였다.[* 1차 남인 집권기에는 서인인 김석주가 병조판서였고 어영대장을 겸했으며 김만기가 훈련대장과 오위도총부도총관을 겸하기도 했으므로 병권 절반이 그래도 서인에게 가 있었지만 2차 남인 집권기는 병권을 모두 남인이 차지했다.] 그 뿐 아니라 의금부도 민암 일파가 다 장악했었던 상태였다. 판의금부사는 공조판서 유명현이 겸임했고, 지의금부사는 훈련대장 이의징이 겸임했는데 이의징이 민암 일파였던 것은 물론, 유명현 또한 민암과 상당히 가까운 사이였다. 그 외에도 민암 자신 또한 판의금부사를 했고, 심재, 유명천, 오시복, 유명현 등 다른 판의금부사도 모두 민암의 일파였다. 이관징과 이우정을 빼고는 모두 민암 일파가 판의금부사를 했던 것이다. 그리고 고작 5년만에 남인의 세도는 기울기 시작했으니, [[숙빈 최씨]]가 왕의 총애를 얻기 시작하면서 숙종의 장희빈에 대한 총애는 약해진 것이다. 1690년 하반기 이후로 조금씩 여론이 나빠지기 시작했고, 장희재의 전횡 및 청나라 조총 3천정 사건으로 남인 정권에 대한 여론이 안 좋아지기 시작했고, 특히 조총 3천정 사건 이후로는 남인 정권에 대한 여론이 불안정해지더니, 사씨남정기와 ''미나리는 사철이요 장나리는 한철이라''라는 노래가 퍼지면서 남인 정권에 대한 여론은 더욱 악화되고 안 좋아졌다. 또한 서인에 대한 여론도 조금씩 다시 반전이 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숙빈 최씨가 숙원으로 책봉이 되면서 남인들에 대한 여론은 더욱 급격히 약화되었고 서인에 대한 여론이 다시 좋아지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장희재가 1693년 갑술환국 이전에 체포가 된 사건이 발생하면서 남인 정권은 더욱 큰 위기에 빠졌다. 숙빈 최씨가 숙종의 총애를 받기 시작하면서 남인 정권은 급격한 레임덕에 시달렸고, 반대로 권력에서 밀려났던 야당인 서인은 이를 기회로 급격히 여론이 반전되기 시작한다. 또한 1693년에 갑술환국 이전에 장희재가 체포된 사건이 발생하면서 남인 정권의 레임덕은 더욱 더 극심해진다.[* 남인 정권도 재집권한 초반기에는 신중하게 처신하는 편이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자만해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숙종은 장희빈에 대한 총애는 거두었어도 남인 정권에 대한 믿음은 쉽사리 거두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남인 정권을 의심했으면서도 여전히 굳건히 신뢰를 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세자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남인들이 점점 거만해지자 숙종은 남인 정권에 대한 기대도 조금씩 접은 것으로 보인다. 또한 게다가 재집권한 남인 정권도 권대운, 목내선, 김덕원 계열과 민암, 장희재 계열로 나뉘어서 싸움을 벌였다. 뿐만 아니라 남인들이 장악한 대간들(삼사)이 남인의 핵심 실세였던 장희재를 탄핵하는 지경에 이르고 남인 세력이 장악한 승정원마저도 승지들이 남인 최고 실세였던 장희재의 처벌을 요청하는 지경에 이르면서 남인 정권의 레임덕은 더욱 심화되었다. 이는 남인 중에서 군부, 포도청의 인원들로 구성된 장희재 세력들과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의 인원들로 구성된 남인 대간들 사이에 반목이 심했음을 잘 알려준다. 그리고 기사환국 이후 시간이 지나면서 귀양을 갔던 일부 서인 인사들이 서서히 귀양에서 풀려나고 서인 세력이 세를 회복한 것도 남인들에게 큰 위기감을 줬다고 볼 수 있다. 이에 긴장한 남인 정권은 서인의 젊은 세력인 소론 함이완, 한중혁, 노론 [[김춘택]], 유복기 등이 인현 왕후를 복위시키기 위해 음모를 꾸미는 것을 포착하여 쟁점화시킨 후 서인을 재기 불능으로 만들려고 했다. 그러나 역으로 유학 김인의 상소에 돌변한 숙종이 민암, 유명현, 이의징, 장희재를 문외출송 시키면서 사태는 환국으로 치달았다. 민암, 유명현, 이의징, 장희재가 하옥되면서 남인 정권은 급격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여기서 살펴볼 것이 장희재를 일개 외척으로 볼 수 있을 것이나, 그것으로는 곤란하다. 장희재가 하옥되면서 남인 정권은 급격히 무너지기 시작했으므로, 장희재는 단순한 외척이 아니라 남인의 상징이었던 것이다. 그 외에는 장희재를 비호한 좌의정 민암이 남인의 영수였다. 그 외에도 영의정 권대운, 좌의정 목내선 등도 남인의 영수였지만 힘을 거의 못 썼고 진정한 남인 정권의 상징은 바로 장희재였던 것이다. 영상 권대운, 좌상 목내선, 우상 민암, 훈련대장 이의징[* 당시 지의금부사도 겸임을 했다.], 이판 이현일, 호판 오시복, 예판 권유[* 당시 대제학도 겸했는데 갑술환국으로 대제학 자리도 박탈되었다.], 병판 목창명, 형판 민취도, 공판 유명현[* 당시 판의금부사도 겸임을 했다.]까지 죄다 쫓겨난 빈자리에 [[남구만]]을 영상으로 임명하고 연이어 [[박세채]]를 우상에 앉혔다가 좌상으로 승진시키고 [[윤지완]]을 우상에 앉히고 훈련 대장에 신여철을 이판에 유상운을[* 유상운은 그 외에 판의금부사도 겸임을 하게 되었다.] 호판에 이세화를[* 기사환국 때 경기감사로 있으면서 오두인, 박태보 등과 인현왕후 폐위 반대를 주장하다가 유배된 자이다.] 예판에 윤지선을[* 본래 형판에 앉았다가 예판으로 옮겼다.] 병판에 서문중을[* 서문중은 그 외에 지의금부사에도 제수되었다.] 형판에 박태상을[* 박태상은 이후 대제학 자리에도 앉았다.] 임명하고 공판에는 훈련대장 신여철을[* 갑술환국 이후 개편된 임시내각에서는 공판에 신익상이 임명되었다.] 임명하여 핵심 수뇌부를 서인으로 채웠으니 이것이 바로 [[갑술환국]]이다. 결국 장희빈은 강등되었고 인현왕후가 복귀했으며, 민암과 이의징은 사사되었고, 조사기와 목창명은 처형을 당했다. 그리고 권대운, 목내선, 김덕원을 비롯한 대신들이 줄줄이 유배가거나 [[향리]]로 전전하게 되어서, 조정에서는 남인들이 거의 박멸당하게 되었고, 경종이 즉위할 즈음이 되면 제대로 된 야당 자리도 갖추지 못하게 된다. 한편 인현왕후 복위를 주도했던 김춘택, 한중혁, 이시회, 이시도, 강만태, 최격은 살아남으나 죄의 형평성 문제 탓에, 다시 한번 조사에 들어가서 이시도와 강만태는 갑술환국과 같은 시기에 처형되었다. 그리고 3년 뒤인 1697년에 김춘택, 한중혁, 이시회, 최격은 다시 한번 조사에 들어가게 되어서 이때 한중혁, 이시회, 최격은 죽임을 당했고, 김춘택은 유배지를 전전하며 곤궁한 삶을 살았기 때문에 인현왕후 복위를 주도했던 사람들의 가문들은 거의 [[풍비박산]]이 나버렸고 결과적으로 이득은 [[소론]]과 [[노론]] 대신들이 가져갔다. 1694년 갑술환국이 일어나면서 남인들이 조정에서 밀려난 이후에 허목의 제자 유형원의 종제인 성호 [[이익(실학자)|이익]]은 "[[실학]]"을 완성시키며 학문 연구와 후학 양성에 진력하였고, 남인 최후의 거두가 된다. 실사구시와 [[붕당정치]]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 사실 붕당 정치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의 대부분은 이익의 논리에서 비롯되었다.] 균전론을 통한 중농주의의 완성 등이 그의 학문의 특징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