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남인 (문단 편집) ==== 집권과 침체를 겪는 남인 정권 ==== 이때 남인의 수뇌부는 [[허적]], [[허목]], [[윤휴]], [[권대운]], [[민희(고려)|민희]], [[목내선]], [[오시수]], [[김덕원]], [[오정창]], [[민암]] 등이 있었는데 서인 정권 밑에서 야당의 위치기는 하나 벼슬을 하며 비교적 잘 지낸 [[탁남]]과 서인에 맞서 예송을 주도한 [[청남]]으로 갈렸다. 윤휴, 허목, 오시수, 이원정, 홍우원 등은 청남이었고 허적, 유혁연, 권대운, 민희 등이 탁남의 영수였다. 탁남 쪽 인사들은 서인 정권에서 요직을 역임했던 경험이 있는 중진들이 많았고 반대로 청남 쪽 인사들은 일부를 제외하면 주로 서인들과 맞선 신진세력들이나 삼사에 포진한 대간들과 언관들이 많았다. 탁남은 정치적 변동을 크게 추구하지 않았지만 윤휴 등 청남은 [[북벌]]을 추구하는 등 여러모로 정권 교체에 따른 변화를 추구했다. 특히 [[대동법]], [[호포제]] 등의 세역 개혁안에 대해서는 윤휴와 허목 등의 인물 사이에 의견차가 있었는데, 윤휴는 대동법에 소극적인 대신 호포제를 추진하였고, 허목은 대동법에는 호의적이었으나 호포제에는 비판적이었다.[* 후에 윤휴가 송시열과 노론에 의해 확고한 [[사문난적]]으로 규정되면서 남인들은 허목을 정통으로 규정하고 그의 후예를 자처하게 된다. 예외가 선명한 노선을 좋아했던 정약용. 참고로 윤휴와 허목 모두 소북 출신으로 남인에 합류한 인사다.] 노비제를 비롯한 사회 질서를 강화하고자 하였으며, [[오가작통]]제와 [[호패법]] 등을 강화하여 호구 파악을 확고히 하고자 하였다.[* 후에 재야 인물이 된 남인 세력([[유형원]] 등)에서는 초기 [[유교]]의 이상이었던 균전제, 한전제 등으로 토지의 집중을 방지하려고 하였다. 이들이 [[실학]]의 [[중농학파]]이다.] 이들은 송시열의 고묘를 주장하면서 협력하기도 했지만 권대운, 유혁연 등이 당시 맹렬하게 북벌을 주장하던 윤휴를 탄핵하거나 비난하고 허목 등이 허적을 탄핵하는 등 서로간의 공방을 멈추지 않았다. 그러나 1680년, 집권 6년만에 [[김석주]]가 허견의 역모를 밝혀내면서부터 시작된 [[경신환국]]으로 남인 정권은 축출되었다.[* 남인 정권은 최초 집권 이후에는 큰 지지를 받았지만, 홍수의 변 및 윤휴 뇌물사건으로 민심을 잃으면서 여론이 약화되어 가고 있었고, 경신환국 직전에 남인 정권은 극심한 레임덕에 시달렸다.] 역모 죄로 단박에 허적, 윤휴, 유혁연, 오시수, 이원정, 오정창 등 남인 정권의 수뇌부가 사사되면서 남인은 결정적인 타격을 입었다. 이 과정에서 야사에는 영상([[영의정]]) 허적이 멋대로 유악을 가져다 써 숙종의 분노를 일으켰다는 유악 일화가 전해오지만,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유악에 대해 일언반구도 없고 허적을 처형할 때도 그의 죄목에는 유악 얘기가 없다. 어쨌든 권대운, 민암, 오정위, 민희, 홍우원 등 살아남은 수뇌부들도 야인이 되었고, 정권은 송시열, 김수항을 위시로 한 서인에게로 돌아갔다. 그러나 9년 후 [[인현왕후]] 폐출과 [[희빈 장씨|장희빈]] 문제로 다시 남인에게 기회가 왔다. 숙종은 장희빈이 [[경종(조선)|경종]]을 낳은지 돌도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원자의 명호를 내리려 했는데, 송시열이 이를 반대하다가 삭직 문외출송되었다.[* [[희빈 장씨|장희빈]]이 원자를 낳으면서 경신환국으로 집권한 서인 정권은 레임덕으로 치닫기 시작했다. 그 이전에도 남인 인사에 대한 과도한 숙청으로 인한 여론 악화, 노론과 소론의 분열, 허새의 옥사 조작, 민유중, 김만기, 김석주 등 삼척의 죽음과 등으로 서인 정권에서도 악재가 수차례 찾아왔지만 명성왕후와 자의대비가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는 서인 정권이 강력하게 유지될 수 있었다. 그리고 장희빈이 원자를 낳기 이전에는 남인 정권도 큰 지지를 받지는 못했다. 장희빈이 원자를 낳고, 자의대비까지 1688년 12월에 세상을 떠나면서 서인 정권의 레임덕은 점점 심화된다.] 또한 숙종은 송시열의 삭직에 동의하지 않은 도승지 이하 4명의 승지들과 대간들을 모조리 파직 및 체직한 후 권대운, 목내선, 김덕원 등 살아남은 남인의 영수들을 삼정승에 기용하면서 다시 남인 정권을 세우니 이가 바로 [[기사환국]]이다. 이번에는 청남, 탁남 할 것 없이 서인에게 관용이란 없었다. 탁남은 서인을 온건하게 대해쥤는데 허적을 죽게 만들고 은혜를 원수로 갚아 이를 가는 실정이였다. 청남 또한 원래 서인에 강경했는데 허견의 역모와 관련없는 윤휴와 유혁연을 사사하여 서인하면 찣어 죽이고 싶을 정도였다. 그래서 청남이나 탁남 모두 할 것 없이, 서인에 대해 원한에 사무쳐 서인의 온건론을 버리고 강경하게 나갔다.[* 사실 허적을 죽이는 데 반대한 서인 대신들도 있었다. [[송시열]], [[김수항]], [[김수흥]], [[민유중]], [[민정중]], [[이정영]], [[홍처량]], [[정지화]] 등의 적지않은 서인 대신들도 허적을 죽이는 데 반대했지만 숙종의 완강한 뜻으로 인해서 실패한 듯 하다. [[김만기(조선)|김만기]], [[김만중]], [[김익훈]], [[김석주]], [[이사명]] 등은 허적을 죽일 것을 청했다.] 단, 이 과정에서 남인도 원호(원자의 명호)지정과 인현왕후 민씨의 폐출만은 반대했다. 남인 역시 서인과 마찬가지로 '조금만 참고 용서하십시오', '여자들이 투기를 하는 건 원래 자연스러운 일이어서 폐출할 이유까진 아닙니다', '(중전이) 스스로 반성하도록 기다려 보십시오'라며 숙종을 말렸다. 그만큼 숙종이 너무 막무가내로 나간 것.[* 그 외에도 남인들이 인현왕후 폐위에 반발한 것은 기사환국으로 재집권한 남인들도 과거 탁남이었고 서인들과 한 때는 가까웠기 때문이라는 것도 있으며, 심지어 장희빈 세력과 가까웠던 민암마저도 인현왕후 폐위에 반발했다.] 이로 보아서 재집권에 성공한 남인 정권도 초반기에는 상황을 잘 보고 신중하게 처신하는 편이었다고 할 수 있다. 남인들이 점령한 대간은 송시열을 안치할 것을 청하자 숙종은 이를 수용함은 물론 심지어 가극[* 유배지에 가시 울타리를 치는 것을 뜻한다.]할 것을 명했다. 남인 정권을 굳힌 왕은 이번에는 인현 왕후를 내칠 것을 명하고 이에 반대하고 연명 상소를 주창한 소론 오두인, [[박태보]]를 고문한 후 유배했으며 오두인과 박태보는 유배 중에 장독으로 인해 사망했다. 장희빈을 중전으로 세우고 인현 왕후는 폐출했다. 그리고 서인의 거두이자 남인의 철천지 원수인 송시열을 사사할 것을 명했다.[* 제주도로 유배갔던 송시열은 서울로 압송되다가 [[정읍시|정읍]]에서 금부도사를 만나 83세로 사사되었다.] 남인은 다시 모든 것을 되찾은것 처럼 보였다. [[허목]]을 시작으로 [[윤선도]], [[오시수]], [[홍우원]], [[이원정]] 등 관작이 추탈된 남인들이 복권되었으며 [[민희(고려)|민희]], [[윤휴]], [[유혁연]], [[허적]] 등 사형당한 남인들도 신원되어 왕에 의해 치제했다.[[이이(조선)|이이]]와 [[성혼]]은 문묘에서 출향되고 파괴된 [[정개청]][* 동인 인물로 정여립의 난 당시 옥사한 인물. 원래 서인의 영수 [[박순(1523)|박순]]의 제자로 박순이 영의정에서 파직되자 화가 미칠까 두려워 동인들과 어울렸다. 후에 정철이 역적의 혐의를 받은 정개청을 가혹하게 고문하여 숨지게 했다.]의 사당이 복구되었다. 또한 허적의 아들인 허견의 옥사에 대한 재조사가 명해졌다.[* 이때 전 훈련 대장인 김익훈이 70세의 나이로 형장을 받다 죽었으며, 김환, 이회 등 고변자들도 모조리 참수되었다. 김석주 역시 관작이 추탈되는 등 죽어서 벌을 받았으며 전 영의정 김수항이 61세를 일기로 사사되었다.] 하지만 [[기사환국]]으로 들어선 남인 정권은 그 이상의 변화를 주도하진 못했다. 과거 허견의 옥사로 핵심 세력이 사사되고 삭직된 청남 대부분도 세상을 뜬 상태에서 집권한 건 탁남 뿐이었고, 그나마 허적 같이 중심을 잡아줄 수 있는 인물도 이미 죽고 없었다. 대표적인 이 시대의 인물인 권대운, 목내선, 김덕원, 이현일 등은 소극적인 인물이었으며, 그 중에서 민암, 유명현, 유명천, 조사기 등이 장희재를 비롯한 외척들과 동맹을 맺고 왕의 철저한 예스맨들로 정권을 유지해갔다. 재집권한 남인세력은 개혁이나 안정, 시정 또는 변화를 이끌기보다는 주로 정권 유지와 정적 숙청에 치중했던 것이다.[* 기사환국은 한 번에 숙청이 끝난 것이 아닌 것으로 추정된다. 1689년에 1차 숙청이 있었고 그 뒤 1690년에 2차 숙청이 있었으며 1691년에는 3차 숙청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