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남양주시 (문단 편집) == 역사 == * 관련 항목: [[양주시/역사]] ||<-9> {{{#fff '''남양주시 행정구역 변천사'''}}} || ||<|3> [[양주시|양주군]] 남부[br](楊州郡)[br](1895) ||<|3> {{{#fff '''→'''}}} ||<|3> 남양주군[br](南楊州郡)[br](1980) ||<|3> {{{#fff '''→'''}}} ||<|2> 남양주군 ||<|2> {{{#fff '''→'''}}} || 남양주군 ||<|2> {{{#fff '''→'''}}} ||<|2> '''남양주시[br](南楊州市, 1995)''' || || [[미금시]][br](渼金市, 1989) || ||<-5> [[구리시]] (九里市, 1986) || 시의 이름 때문에 [[남양유업]]이나 [[현대자동차]] 남양연구소 등이 있을 듯 하지만 사실 연관은 없다. 둘 다 유래는 [[화성시]] 남양읍이며,[* 남양유업은 오너 일가의 본관인 '''[[남양 홍씨]]'''에서 따와서 지은 것이고 현대자동차 남양연구소는 남양읍에 위치해 있다. 그 외에도 남양성모성지 등 '''남양'''이라는 이름이 들어간 것은 대부분 화성시 남양읍과 연관이 있다.] 남양주시 이름의 유래는 문자 그대로 '양주의 남쪽'이라는 의미로[* 정작 서울의 고지명 중 하나인 고양주면이 현 [[광진구]] 일대라는 걸 감안하면, '''오히려 이쪽이 오리지널 양주'''에 가깝다. 현 양주 일대는 본래 견주라고 불린 지역.] 옛 [[양주시|양주군]] 시절의 흔적이다. 1963년 양주군 한가운데에 있었던 의정부읍이 [[의정부시]]로 승격되고, 그 외 다른 면들[* 노해면([[노원구]]+[[도봉구]]), 구리면 일부([[중랑구]])]이 [[서울특별시]]로 편입되면서 양주군은 북부와 남부로 [[월경지|행정구역이 완전히 떨어져 버린 것]]. 그러다가 1980년 남부 전역을 '남양주군'으로 신설해 양주군과 분리시킨 것이다. 월경지가 워낙 큰데 다른 뾰족한 수가 없어서 나눈 대표적인 사례이다. 다만 '남양주'란 명칭 자체는 분군 이전에도 쓰여온 듯 하며, 과거 신문 기사에서는 이 '남양주'라는 이름 때문에 지금의 양주를 '북양주'라고 칭하기도 한 것으로 보인다. 사실 양주군을 남북으로 분할할 때 지금의 양주를 '북양주'로 개칭하려 했다.[[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0030700329206009&edtNo=2&printCount=1&publishDate=1980-03-07&officeId=00032&pageNo=6&printNo=10595&publishType=00020|#]] 사실 (북)양주 자체가 역사적으로 옛 양주읍치가 소재한 '오리지널 양주'라고 할 수 있으므로 굳이 '북'을 붙일 필요가 없기도 하다. 삼국시대 골의노현(진접, 진건, 오남), 북한산군(나머지)이었다가 고려부터 양주에 속하게 되었다. 원래 진접읍, 진건읍 일부와 오남읍 일대는 [[조선]] 시대에 '[[풍양현]](豐壤縣)'이라는 이름의 독립된 행정구역으로 존재한 적이 있다. 국사 시간에 들어봤을 [[세도정치]]기 외척 가문인 [[풍양 조씨]]의 본관이 이 곳으로, 풍양 조씨의 시조인 조맹(趙孟)의 묘가 진건읍 송릉리에 있다. 풍양은 원래 고려 때는 양주의 속현이었다가 [[포천시|포주]]로 소속이 바뀌었다가 현으로 분리되었는데, 조선 초기만 해도 왕들의 근교 휴식처와 많은 [[왕릉(무덤)|왕릉]] 부지로 쓰였으나 [[세종대왕|세종]] 9년(1427년)에 현 자체가 폐지되어 양주에 흡수되었다. 그 이후로도 풍양현은 조선이 망할 때까지 끝내 부활하지 못해서 현대에 와서도 이 지명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드물었으며 인지도도 풍양출장소가 설치되기 전까지는 [[듣보잡]] 수준에 가까웠다.[* 오늘날 설치된 풍양출장소의 관할구역은 옛 풍양현의 관할구역과는 달라졌는데, 진건읍이 제외되고 진접읍, 오남읍, 별내면, 퇴계원읍, 별내동이 속한다.] 1980년 12월 와부면이 와부읍으로 승격되었다. 1983년 현재의 오남읍 지역이 진건면에서 진접면으로 편입되었다. 1986년 구리읍이 [[구리시]]로 승격되어 독립했고, 와부읍 동부(구 광주군 초부면)가 조안면으로 분리되었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미금시 시기.svg|width=100%]]}}} || || [[미금시|{{{#fff '''미금시(1989~1995)의 시기'''}}}]] || 1989년 [[미금|미금(渼金)]][* 별내동을 제외한 남양주시의 동 지역이며, 구리와 이 이름은 '''일제가 만든 것이다'''(구리, 미금뿐만 아니라 별내(별비+내동)(내동면은 오늘날의 의정부시 [[고산동(의정부)|고산동]]과 [[산곡동(의정부)|산곡동]] 일대를 말하며, 별비면은 사실상 현재의 [[별내면]]의 전신이라고 보면 된다. 놀랍게도 노원구 상계4동 신상계초등학교 이북과 동막골, 상계3동의 당고개 이북의 일부 지역의 일대와 [[별내면]] 전 지역, 그리고 의정부시 산곡동 흑석마을까지 관할했다. 당고개역 일대와 흑석마을 일대가 별비면의 월경지였다.), 진접(진벌+접동), 진건(진관+건천), 와부(와공+초부), 화도(상도+하도)(호평동이 이곳에 속해 있었는데, 이때 [[호평동]]을 제외한 [[평내동]]은 평촌리, 금촌면에 속해 있었다. 즉 호평동은 상도면의 월경지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등 대부분의 읍면명이 이때 일제에 의해 인위적으로 조합되어 만들어졌다). 1914년 [[부군면 통폐합]] 당시 미음면(渼陰面)의 '미'와 금촌면(金村面)의 '금'을 따와 미금면이라 합쳐버린 것. 참고로 '미음'이라는 이름은 수석동 한강변에 옛날 나루터였다가 지금은 고급 한정식 식당들이 모여있는 '미음나루'에서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다고 하지만 미음나루라는 이름은 잘못 전해진 것이고 원래 미호나루였으며 미음면도 조선시대 지리지들에 독음면이라고 분명히 나와 있는데 미금이라는 명칭 자체부터 갈수록 인지도가 낮아지고 있는 상황이라 저 사실도 사람들이 거의 알지 못하는 형편이다.]읍이 시로 분리되고 별내면에서 퇴계원면이 분리되었다. 1991년 화도면과 진접면이 화도읍, 진접읍으로 승격되었다. 1992년 진접읍 오남리, 양지리, 팔현리 일대에 오남출장소가 설치되었다. 1995년 정부의 행정구역 통합정책에 따라 미금시와 남양주군을 재통합해 도농복합 형태인 남양주시로 승격했다.[* 구리시도 통합하는 방안이 있었으나 결국 이대로 확정.] 비록 미금시는 짧은 시간동안 존재했지만 도농동에 있는 미금초등학교와 미금중학교 그리고 구 미금시 지역(별내동을 제외한 남양주시 동 지역)에 위치한 미금농협 지점들에 그 흔적이 남아있다. 또한 진접읍 오남출장소가 오남면으로 분리, 승격되었다. "방위명+타 지자체명" 형태의 지자체명은 전국에서 남양주시가 유일하다. 예전에는 [[동광양시]]가 있었으나, 동광양시는 1995년에 광양군과 통합되어 [[광양시]]가 되었다. 이처럼 [[양주시|인근 지자체]]로부터의 위치로 이름이 지어졌다는 점 때문에, 일부 시민들을 중심으로 시의 특색을 살릴 명칭으로 변경해야 한다는 여론이 간간히 생기는 편이다.[* 다만 동광양시 케이스와는 다른 점이, 남양주라는 이름의 유래가 '남쪽의 양주시'라는 것은 남양주시민들도 대부분 모른다. 지리적으로 [[양주시]] 남쪽이 맞긴 한데 양주시와는 [[의정부시]]와 [[포천시]]를 사이에 두고 물리적으로 떨어져있으며, 이 때문에 양주시 자체와 교류도 없는 편이다. 또한 상술했다시피 남양유업, 남양건설 등 남양이라는 이름이 쓰인 곳이 꽤 많기 때문에 남양주도 이런 맥락으로 '남양+주'일 것이라고 오해를 사는 경우가 있긴 하다. 그래서 남양주라는 이름이 남쪽의 양주시라고 직관적으로 떠올리기가 힘들다. --남의정부시나 남포천시였으면 딱 봐도 이상하다고 느껴질 것이다--] 일례로 남양주 시민 일부가 2017년에 [[다산신도시]] 입주를 앞두고 시 명칭을 특색에 맞게 '''다산시'''로 개칭하자고 요청한 바 있다. [[http://m.kyeongin.com/view.php?key=20171106010001637#rs|남양주시 명칭 '다산시'로 개정 여론 왜?]] [[http://www.joongboo.com/news/articleView.html?idxno=1209930|중부일보 기고문]][* 최삼휘 남양주시 평생교육원장이 기고한 글로, 개정여론 기사화 이후 기고하였다. 다산(茶山)의 의미를 중심으로 시 개칭 근거를 주로 다뤘다.] 그러나 당시 시 관계자도 "시 명칭 개정 시 행정 및 재정적인 문제와 직결돼 있어 쉽지 않다"고 난색을 표한 바 있으며, 다산이 신도시 지정 이후 이미 지명으로 쓰이고 있기에 다핵도시인 남양주 특성상 다산시로 개칭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그리고 다산신도시라는 명칭은 물론 행정동/법정동으로서 다산동이라는 명칭이 고착화가 되어가는데 한편으로는 다산신도시 주민들이 오히려 타지보다 다산시라는 가상의 명칭을 부정적으로 여기기도 한다.[* 다산신도시 구역이 아닌 도농, 지금동 지역이 다산동으로 편입된 것을 기분 나빠하는 신도시 주민들이 특히 그렇다.] 그리고 다산동이 아닌 기존 남양주 지역에서도 다산시 개칭에 대한 여론은 그리 좋지 않다. 다산동을 제외한 나머지 동네들을 다산동의 들러리로 치부하는 느낌이 들기 때문. 사실 이런 여론은 다산신도시가 생기기 전에는 없었으나 다산신도시 개발 후 남양주에 다산이란 지명이 만들어지면서 생긴 여론이다. '다산'이라는 단어가 남양주를 대표하는 아이덴티티였다가 다산동만을 대표하는 아이덴티티가 돠어버린 것. 결론적으로 다산신도시 개발 이후 다산시 개칭은 다산동 주민이나 비(非)다산동 주민이나 모두에게 환영받지 못하면서 사실상 불가능해진 명칭이다. 2001년에 오남면과 진건면이 읍으로 승격되었으며, 2019년에는 퇴계원면이 읍으로 승격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