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남북전쟁 (문단 편집) === 미주리 타협과 1850년 타협 === 연방 내 북부와 남부 갈등에 있어서 가장 큰 문제는 자유주와 노예주의 숫자였다. 미국은 건국 초기부터 북부 자유주들과 남부 노예주들의 숫자를 맞춰서 정치적 밸런스를 유지해 왔다. 이러한 와중에 1818년 서부의 [[미주리]] 준주가 주 승격 요건을 충족하여 [[미 의회]]에 연방 가입 신청을 하였다. 문제는 미주리가 노예주로 연방 가입 신청을 하였고, 이로 인해 당시 11:11이던 자유주와 노예주 사이의 균형이 깨질 위기에 처한 북부의 자유주들이 미주리의 연방 가입을 거세게 반대하고 반대로 남부의 노예주들은 미주리의 연방 가입을 지지하면서 벌써부터 남북 간에 분열사태가 터져나올 판이었다. 이런 양측의 갈등을 중재한 것이 남북전쟁을 적어도 50년 이상 늦췄다는 평을 듣기도 하는 [[헨리 클레이]] 상원의원이었다. 클레이는 자유주와 노예주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미주리의 연방 가입 문제와 당시 한창 시끌시끌하던 [[매사추세츠]]주 북부의 분리독립 문제를 접목시켜 1820년 '미주리 타협'이라는 타협안을 내놓았다. 즉 매사추세츠 주 북부를 [[메인주]]로 승격시킴으로써 자유주의 수를 늘리고, 미주리는 원래대로 노예주로서 연방 가입을 시켜주면서 남북간의 균형을 맞춘 다음, 아직 주로 승격되지 않은 지역에 대해서는 [[위도]] 36도 30분선을 기준으로 그 이남은 노예주로, 이북은 자유주로 합의함으로써 양측간 비율을 1:1로 맞춰 갈등을 수습하는 데 온 힘을 기울였다. 남부 주들은 오래전부터 노예반란을 매우 두려워했다. 이는 [[토마스 제퍼슨]]도 언급했을 정도로 꽤나 진지하고, 심각한 문제로 받아들여졌다. 마침 1791년 [[아이티]]에서 흑인 혁명이 일어나서 소수 백인 지배자들이 남녀노소할거 없이 몰살을 당했기에, 1800년대 내내 노예반란은 분명한 상수로서 존재했다.[* [[사우스캐롤라이나]] 같은 주들은 흑인 노예 비율이 50%에 근접하여 이런 대규모 인종 전쟁을 매우 두려워했다. 그래서 인구 대비 노예 비율이 높을수록, 인구 대비 노예를 소유한 가구가 많을수록 연방에서 더 빨리 탈퇴하는 현상을 보여준다.] [[버지니아]] 주에서 일어난 [[냇 터너]](Nat Turner)의 반란(1831)같은 노예들의 저항은 이들에게 현 실태로 보였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미국-멕시코 전쟁]](1846-1848) 이후 멕시코에게 새롭게 삥듣은 땅에 대한 논쟁이 벌어진다. 미주리 타협은 어디까지 루이지애나 매입을 통해 얻은 땅에만 유효한 법안이었기 때문에 미국-멕시코 전쟁으로 얻은 땅에 대해서는 새롭게 법을 만들어야 했다. 여기에 북부는 북서부 조례(The NorthWest Ordianance)를 예로 들면서 멕시코와 전쟁을 통해서 새롭게 얻은 땅에 노예제를 폐지하자고 윌몬 법안(Wilmot Proviso)을 제안하였다. 당연히 남부는 반발하였지만, [[캘리포니아]](1850)는 일부 지역이 위도 36도 30분선 아래에 있었음에도 노예제를 금지하는 자유주로 연방에 가입하려고 하였다. 남부주들은 캘리포니아의 연방가입을 늦추며 새로운 노예주를 찾으려고 하였지만, 대부분 노예노동이 동원되는 플랜테이션에 적합하지 않은 지역들이었다. 이로 인해 정치적 균형이 깨져, 결국 노예제 폐지가 전국적으로 옮겨 갈 것을 우려한 남부의 반발로 연방 붕괴의 조짐까지 보인다. 이때 백가쟁명으로 각종 아이디어들이 [[http://ko.wikipedia.org/wiki/1850년_타협|떠올랐는데]], 헨리 클레이는 30년 만에 다시 타협안을 제안한다. 클레이의 안은 다음과 같았다. >1) [[캘리포니아]]는 자유주로 편입한다. >2) [[유타 주|유타]]와 [[뉴멕시코]]는 주민투표에 의하여 노예주의 유지 여부를 결정한다. >3) [[워싱턴 D.C.]]의 노예주 지위는 유지하되, 노예 시장을 없앤다. >4) 36도 30분 이북 [[텍사스]]의 영역을 [[뉴멕시코]] 준주에 양도하고, 정부는 그 대가로 텍사스 주에 [[멕시코]]와의 전쟁에서부터 나온 비용을 지불한다. >5) 도망노예단속법을 강화한다. 클레이의 안은 [[대니얼 웹스터]] 등 휘그당 온건파, 민주당 온건파의 지지를 받았지만 [[존 C. 칼훈]] 등 남부 민주당 강경파, [[윌리엄 H. 수어드]] 등 북부 휘그당 강경파의 반대를 받아 통과에 어려움을 겪었다. [[재커리 테일러]] 대통령 또한 타협에 부정적이었고 남부 노예제 지지자들에 대해 강경한 자세를 유지했다. 하지만 테일러 대통령이 사망하면서 남부에 동조적인 휘그당 온건파 [[밀러드 필모어]]가 대통령이 되었고, 민주당 온건파 [[스티븐 A. 더글러스]]는 칼훈 사후 클레이의 안을 5개의 법안으로 쪼개어 각각을 의회에서 통과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5항에서 다시 갈등이 발생한다. 강화된 도망노예단속법으로 소위 노예사냥꾼들이 등장하면서 자유주라 할지라도 마음대로 가택수색을 할 수 있는 상황이 발생하였고, 이에 북부 주들은 체포당한 노예에게 재판받을 권리를 줘 시간을 끌 수 있게 하는 주법을 만들어 대항했다.[* 기실 북부 입장에서는 당연한 것이 남부측의 '주의 권리' 운운을 위해선 북부주들의 권리도 존중해주어야 한다. 그러나 어떤 주에서 다른 주에 멋대로 넘어가 가택수색을 한다든가 하는 행위는 명백히 주의 권리를 침해하는 행위다. 그나마 자기 노예를 되찾는 것이라면 남부 입장에서도 '내 재산을 되찾는 건데 재산 되찾는 것도 내 권리 아님?' 이라고 변명이라도 할 수 있지만 '''이들은 자기 노예만이 아니라 해방 노예들까지 멋대로 잡아갔다.'''] 거기다 작가 해리엇 스토우도 [[톰 아저씨의 오두막]]이라는 소설로 노예제의 비도덕성을 꼬집었고, 소설이 널리 알려지면서 남북전쟁을 가속화시켰다는 평가를 받는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