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남북전쟁 (문단 편집) === 노예제 === > 스스로 분열된 집안은 바로 설 수 없다. 나는 이 정부가 절반은 노예로, 나머지 절반은 자유민으로 살아가는 상태를 영속할 수 없음을 믿는다. > (A house divided against itself, cannot stand.[* [[킹 제임스 성경]] [[마르코 복음서]] 3장 25절{{{-2 ("If a house be divided against itself, that house cannot stand.")}}}의 인용으로 추정된다.] I believe this government cannot endure, permanently, half slave and half free.) >---- > [[에이브러햄 링컨]], [[공화당(미국)|공화당]] [[전당대회]]에서 상원의원 후보직 수락연설을 하며(1858년 6월 16일). [[https://en.wikisource.org/wiki/Life_and_Works_of_Abraham_Lincoln/Volume_4/A_House_Divided_Against_Itself_Cannot_Stand|#출처]] >전문가들(미국 남북전쟁 역사학자들) 사이에서는 [[노예제]]가 전쟁 전의 남부, 남부 노예주들의 분리 그리고 전쟁에서 가장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는 것에 대해서 더이상 이론이나 반론이 있지 않습니다. >---- >[[휴스턴 대학교]] 에릭 발터 역사학 교수 '''남북전쟁의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노예제 존속을 둘러싼 갈등이었다'''. [[관세]], 자치 제도, [[연방제]] 구조 등등 여러 원인들이 있었으나 따지고 보면 부차적이거나 전부 그 근원이 [[노예제]]에서 비롯되었고, 남부의 독립과 전쟁은 노예제가 없었으면 일어날 수가 없었다.[* 예를 들어 관세같은 것도 북부는 유럽과 경쟁하면서 공업제품을 만들어다 수출했기 때문에 보호무역을 주장했지만 남부는 목화를 생산하는 족족 판매할 수 있었기 때문에 자유무역을 주장했다. 그런데 목화 재배는 대표적인 노예제 노동에 해당되었다. 자치제도 및 연방제 역시 마찬가지로 국가 이미지를 떨어뜨리고 국민의 단결을 저해하는 노예제를 없애려는 중앙 정부와 우리 맘대로 하겠다는 지방의 대립이 나타났다.] 특히 관세 어쩌고는 역사적 미국 관세 차트[* 전쟁 터지기 전의 관세율이 역사상 최저치였는데 높은 관세 때문에 전쟁이 났다고 하는 바보들이 미국에 아직도 너무 많다. 그리고 들고 오는게 이미 남부주들이 독립한 다음 통과된 Morrill Tariff이다. 심지어 상원은 민주당이 다수당이었던지라 남부주 출신 상원의원들이 알아서 사퇴하지 않았다면 통과될 수도 없었다. 애초에 현대 미국 극우층이 좋아하는 주제가 남부연맹 옹호, 왜곡된 의미에서 작은 정부 숭배(한마디로 세금 적게 들어가는 작은 정부여야 하지만 동시에 패권국가 미국이어야 한다는 것.), 세금이랑 공권력 혐오이기에 팔리는, 19세기 중반 당시의 역사하곤 전혀 상관없이 현대 미국 정치지형으로 인해 팔리는 설이다.]만 봐도 알 수 있으니 남북전쟁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사람에게 이 말을 꺼내면 비웃음을 사기 딱 좋다. 애초에 남부가 그렇게 관세에 민감한 플랜테이션 농업 위주의 경제구조에 의존하도록 만든 것 자체가 노예제가 원인이다. '''노예제는 연방 시작 전부터 뜨거운 감자였다'''. 계몽주의의 영향으로 노예제는 도덕적으로 '사악한 것'이라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었으며, 미국 독립선언문의 영향으로 인간이 최소한 자유, 생명 그리고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있다는 사상이 퍼지기 시작했다.[* 북부에 정착한 이민자들의 주류가 영국 [[청교도]]-[[퀘이커]]교도, 아일랜드 [[가톨릭]]교도, 독일계 망명 [[자유주의]]자 같은 종교적-정치적-사회적 자유 추구자들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반면 북부와 자연환경이 정반대인 남부에선 경제적 자유를 추구하는 부유층 상인들을 중심으로 개척이 이루어져 노예제와 [[자유방임주의]]에 대해 의심조차 품지 않았다.[[https://www.youtube.com/watch?v=t5YrmNLaiTE]]] 문제는 이 사상이 당시 미국에서 당연하게 여겨졌던 노예제에 정면으로 반한다는 것이었다. 이로 인해 독립하자마자, 노예제의 수익성이 노예제를 유지할만큼 좋지 않았던[* 그래도 북부에서도 노예무역은 수익이 괜찮게 나오는 사업이었지만, 다른 사업도 많은데 굳이 욕을 먹거나 양심을 속여 가면서까지 노예 장사를 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에 쇠퇴해가는 중이었다. 19세기 구미권의 노예제 폐지를 오로지 경제문제로 설명하면서 노예무역은 돈이 되지 않았다느니, 노예제는 생산성이 너무 떨어졌다느니 하면서 노예제를 오로지 돈낭비로 보는 수정주의가 흥한 적이 있지만 최소한 남북전쟁 시기 직전까지 남부에서 노예제는 경제적으로 돈이 되는 제도였다. 노예제 폐지에는 분명히 종교적, 윤리적 동기가 매우 강력히 작용했다.] 북부에서는 노예제 폐지 운동이 일어났고, 이를 바탕으로 뉴저지 주를 마지막으로 대부분의 북부 주들은 1850년대까지 노예제를 단계적으로 폐지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노예제의 수익성이 더 좋았던 남부주는 상황이 달랐고 이 차이는 '3/5 협정', '20년간 국제 노예무역 허용' 등 각종 타협으로 이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부에서는 꾸준하게 노예제가 폐지되어 갔고, 초창기에는 필수노동의 형태로 노예를 착취해 남부의 개척과 농업경제를 다 만들어낸 이후 그 결과물인 담배 등 상품작물의 수익성이 떨어져 가던 버지니아 등 북쪽의 남부 주들도 슬슬 노예제 폐지로 여론이 기울어 가고 있었다. 하지만 [[조면기]][* 당시 미국에서 기르지 않던 장모종용 조면기는 고대 인도에서 발명된 이후 계속 있어 왔으나, 개량이 크게 이루어지지 않아서 미국에서 기르던 단모종을 위한 조면기는 없었고, 그래서 손으로 씨앗 제거 작업을 해야했다.]가 덜컥 발명되면서 상황이 완전히 바뀌게 된다. 그때까지 면화는 수요는 많았으나 씨앗을 빼내기가 너무 성가셨기 때문에 수확을 해도 대량으로 시장에 내놓을 수가 없었는데, 조면기의 발명 이후 이 과정이 아주 수월하게 변한 데다가[* 최초로 개량된 조면기 하나가 30 ~ 50명 분의 수작업만큼 일을 처리할 수 있었고, 후에 개발한 모델은 또 초창기 모델의 50배만큼 효율이 좋았다.] 동시에 씨앗 제거에 종사하던 노예까지 모두 목화재배에 몰아넣을 수 있었기에 엄청난 수익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목화는 공급만큼 수요가 창출되던 상품이라 다다익선이었고 그 재배에는 여전히 많은 노동력을 요구하였던 까닭에, 수익성을 입증한 노예제는 계속 남부에 남아있게 된다. 흑인 노예의 전형적인 모습인 목화 따는 모습이 이때 가장 흔한 노예의 일상이었다. 기후 조건 때문에 면화 농장은 점점 남서부로 이동하고 있었다. [[사우스캐롤라이나]]에서 [[조지아 주|조지아]]가 중심이 되었던[* [[기아자동차]] 미국 현지 공장이 있는 조지아 주의 웨스트 포인트가 한 예로 주력 산업이 방직업이었다가 사장된 지역이다.] 면화 농업은 다시 [[미시시피]]와 [[앨라배마]] 주로 주도권이 이동했고, 이후에는 [[루이지애나]]가 급부상했다. 이 5개 주가 당시 미국 면화 생산량의 3/4 이상을 차지했고 미국의 면화 생산량이 당시 세계 면화 생산량의 3/4를 차지했다. 5개 주는 플로리다, 텍사스와 함께 가장 먼저 미합중국을 탈퇴하고 남부연합을 세웠다. 두 번째는 노예 자체의 가치이다. 이 시기는 미국 남부를 제외하면 유럽 등 소위 근대화된 국가에서는 노예 무역이 끝장난 시기였다. 미국도 노예 수입은 이미 [[1808년]]에 법으로 금지되었기에 플로리다, 텍사스와 멕시코를 통한 불법 수입이 등장하였다. 이건 당시 주간 거래에서 큰 비중을 차지했지만, 가격 폭등에서 알 수 있듯이 공급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했고, 이후 노예 [[출산|생산 단계]]로 접어들어서야 노예 가격 폭등이 누그러지기 시작한다. 그럼에도 남북전쟁 시기까지도 노예 공급은 줄어 갔고 가격은 꾸준히 상승세였다. 면화 산업의 발달[* 면화 생산은 본격화된 시기를 기준으로 10년마다 2배씩 증가하였다.]이 더해지면서, 시장 원리에 따라 노예 가격은 꾸준히 치솟고 있었다. 담배 농업이 무너지고 면화 농업이 각광받기 시작한 [[1800년]]에서 [[1850년]] 사이 노예 가격은 인당 약 50달러에서 800~1,000달러까지 상승했다. 그러니까 갈수록 노예의 생산력보다 노예 자체의 가치가 좀 더 부각되고 있었다. [[1850년대]] 무렵 노예들의 가치는 당시 화폐로 약 20억 달러 정도였는데, 이건 남부가 소유한 총자본의 약 1/4이며 연방 예산의 10배 정도였다. 면화 작물의 가치도 이것의 1/10 정도밖에는 안 되었다. 이처럼 노예는 비싼 재산이었고, 노예제 폐지는 그 재산을 통째로 증발시키는 것이었다. 이 비싼 노예 가격 때문에 전쟁 직전까지도 남부에서 노예를 거느리던 사람은 백인들 중에서도 [[플랜테이션]] 농업을 하던 상위 5% 이상의 대부호들이었다. 백인 인구의 하위 80%를 차지하는 대다수 중소 자영농~빈농들은 노예를 부린 적도 부릴 일도 없었으나 오히려 이들이야말로 노예제 폐지에 가장 격렬하게 그리고 가장 끝까지 저항한 부류였다. 남북전쟁의 발발 원인에는 경제적 요인도 있었지만 정치적, 가치관적, 생존적 문제가 더 중요했다는 것을 증명하는 예이다.[* 기실, 노예제 자체는 남북전쟁 말기 워낙 궁지에 몰리자 남부 대통령이던 제퍼슨 데이비스가 맞불로 해방을 진지하게 고려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이 사람이 온건파이거나 한건 당연히 아니고 지독한 인종차별주의자였다.] 이런 도덕적 논란은 당시 미합중국이 브라질과 스페인령 [[카리브]] 섬들을 제외하면 [[백인]] 문명권에서 유일하게 노예제를 굴린다는 것 자체가 큰 원인이었다. 원래는 노예의 필요성에서 시작했을지 몰라도, 이것이 외부의 가치와 대립하는 과정에서 [[흑인]] 노예들의 존재를 통해 자신들의 인종적[* 이 시기 남부에서는 수많은 사이비 인종학자들이 흑인 열등론을 전파하고 있었다. 이들은 흑인은 가장 저급한 부류이자 퇴화한 존재였기 때문에 이들을 구제할 방법도 없다고 믿고 있었다.], 문화적 [[우월성]]을 만족시키는 것을 넘어서 도덕적 잣대로까지 나아가고 있었다.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마크 트웨인]]의 <[[허클베리 핀의 모험]]>과 같이 당대가 배경인 소설들이다. 작중 핀은 친구인 흑인 노예가 도망나왔다가 노예 사냥꾼에게 잡힌 것을 보고 이를 구해야 할 지 갈등하는데, 왜냐하면 도망나온 노예를 고발하지 않으면 지옥에 간다는 도덕과 신앙이 주입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자기 멋대로 사는 부랑아지만 최소한의 인륜도덕은 가지고 있는 핀이 고민 끝에 결국 내가 [[지옥]]에 가겠다고 굳은 결심을 해야 친구인 도망 노예를 도와줄 수 있을 정도였던 것이 당시 남부의 해괴한 도덕관이었다. 노예를 가진다는 것 자체로 부유함과 우월함의 상징이 되는 것이 이 시기 남부 백인 사회의 모습이었다. [[앤드루 잭슨]]처럼 가난한 백인 남성이 자수성가하여 플렌테이션을 사고 노예를 부리는 것이 이 당시 남부의 '아메리칸 드림'이였다. 게다가 이 시기 미국 남부는 [[유럽]] [[귀족]] 사회를 모방하는 경향이 강해지고 있었다. 대부호들은 자신들과 노예를 통해 유럽식 귀족과 평민을 구현했고, 이런 상류층의 문화는 하류층으로 전파되었다. 실제로 남부를 지배하던 대농장 소유주들과 이들과 밀착한 남부교회들은, 어떤 면에서는 노예들보다 살짝 더 나은 처지밖에 못 되었던 가난한 백인 자영농들에게 너희들이 아무리 못나고 가난해도 깜둥이보다는 훨씬 우월하다라는 [[이데올로기]]를 끊임없이 주입하였다. 즉 이것은 남부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며 가난에 시달리던 백인 하층민들의 분노가 대부호들을 향하지 못하게 막아주는 장치였다. 따라서 북부에서 노예제 폐지론이 득세하자, 남부 엘리트들은 이걸 방치하면 자기들의 사회문화적 우위를 완전히 상실한다고 판단하고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그리고 엘리트들로부터 인종차별 이데올로기를 주입당했던 남부의 하류층들은, 정작 자신들은 해방으로부터 지킬 노예를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면서(!) 전쟁의 막바지까지 가장 격렬하게 싸웠다. 이들의 입장에서 보면 아무리 가난에 시달리더라도 '그래도 나는 저 깜둥이 노예보단 우월하고 고귀한 백인'이라는 자부심에 기대서 살아왔는데, 노예제가 폐지되면 '''해방된 노예의 자리에 내가 굴러떨어지도 모른다라는 공포'''가 주입되었기 때문이다. 이미 이들 상당수는 노예를 관리하는 자들로 노예 질서에 예속된 상태인데, 자신이나 깜둥이나 매한가지 대농장주들한테 시달리는 동급의 가난뱅이가 되는 걸 넘어 그 흑인의 자리까지 떨어질지도 모른다는 공포를 받아들일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미국 역사학자들은 전쟁 전 남부사회를 단순히 노예가 있는 사회(Society with slaves)가 아닌, 노예제 자체가 사회 구조의 핵심위치에 있으며 노예제 없이는 그 사회 자체도 유지될 수 없는 '노예 사회(Slave Society)'라고 정의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