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남북전쟁 (문단 편집) === 군사적 의의 === 미국 내에서만 벌어진 전쟁이라 잘 인정받지 못하는 경향이 있으나, '''최초의 근대적인 [[총력전]]'''이다.[* 미국 남북전쟁은 세계사 적으로 이전과 이후 시대의 전쟁을 비교하면 과도기적 모습이 많이 보이는 전쟁이었다. 전열보병 위주의 전투 방식은 과거에 비하면 그 위력이 많이 사라졌지만 이 때까진 유효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산개와 엄폐, 그리고 원시적 참호전의 양상이 선보여졌고 속사가 가능한 연발 화기의 제식화도 이루어졌다. 그러면서 총력전의 요소인 관료제를 통한 전쟁수행능력의 증대와 체계적 실행으로 이를 통한 범국민 및 산업적 역량의 총동원이 구현된 전쟁이기도 했다.] 모든 국가적 역량을 동원해서 싸우는 총력전은 이미 나폴레옹 전쟁 때의 프랑스가 완전하지는 않아도 선보인 바 있지만 나폴레옹 전쟁을 총력전이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후술하겠지만 남북전쟁의 군사학적 최대 의의는 기존과는 판이한 '전술의 변화'일 것이다. 당장 이전의 크림 전쟁만 해도 전열보병이 주축이 돼서 싸웠다. 그러나 남북전쟁 이후론 더이상 전열보병이 주축이 된 전투가 없었다. 당장 그 뒤에 벌어진 오스트리아-프로이센 전쟁과 프랑스-전쟁만 봐도 그렇다. 또한 기병 역시 전통적인 충격력을 이용한 돌격전만을 수행한 것이 아니라 오늘날의 [[기계화보병]]처럼 활용되어 하마 상태로 싸우는 경우가 크게 늘어났다. 유럽에서는 1차 세계 대전 때나 경험하게 되는 현대전의 모습들이 비행기[* 비행기는 없지만 [[열기구]]를 통해서 정찰을 수행했다는 기록이 있다.]와 전차[* 철도를 두고 벌어진 싸움에선 [[장갑열차]]가 전차의 역할을 했다]의 존재만 빼고 대부분 여기서 벌어졌다고 보면 된다. [[후장식|총기 기술]]과 정밀도의 발전으로 보병 전술이 이전과는 달라짐과 동시에 최초로 샤프슈터라는 병과가 탄생해 전장에 투입되고[* 저격수 자체는 미국 독립 전쟁 시대에도 켄터키 라이플을 들고 산병전을 벌이던 미닛맨들이 있었던 만큼 예전부터 있었고, 이후 영국이 아예 라이플 연대를 창설하며 별도 경보병 편제를 해왔지만, 샤프슈터처럼 일반부대에 섞여 저격을 하는 개념과는 달랐고, 당시 [[전열보병]] 교리상 허용될 수 없는 개념이었다.] 수동식 기관총이 실전에 투입되었다. 이미 [[미니에 탄]]이 사용되고 있어서 총기의 명중률과 연사력이 높아진 데다, 전쟁 말기의 연방 서부군에선 [[스펜서 소총]], [[헨리 소총]]같은 연사화기가 주력으로 보급되었기에 [[나폴레옹]] 시대와 같이 개활지에서 대오를 갖춰 일제사격을 노리는 전투는 상대측에게 사격 연습 타겟을 제공해 주는 것이었고, 엄폐의 개념이 매우 중요해진다. 가장 극적인 사례로는 이전 시대라면 한방 맞아주고 [[착검돌격]] 와중에 넘어갈 수 있었던 돌담 하나의 차이로 1대 30의 교환율을 찍은 프레데릭스버그 전투 및 피켓의 돌격과 같은 사례도 있으며, 양쪽 군대는 대부분 산능선이나 나무 등의 엄폐물이라도 끼고 싸우는 걸 선호했다. 더 나아가 빅스버그 포위전과 [[피터스버그 포위전|피터스버그 전투]]의 경우 아예 [[제1차 세계대전]] 때와 같은 [[참호전]] 및 터널 전쟁의 양상이 나타나기도 했다. 남북전쟁을 참관했던 유럽 군인들은 하나같이 "역시, 촌놈들은 전쟁을 무식하게 하는구만ㅋ."이라고 했다. 그들 입장에서는 보병들이 전열도 갖추지 않고, 총소리만 들리면 죄다 흩어져서 여기저기 숨기 바쁘고, 땅만 파놓고 적이 오기 전까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전투 양상은 50년 후에 유럽에도 똑같이 재림하게 된다. 하지만 이렇게 무기가 발전했음에도, 보병들끼리의 전투는 [[나폴레옹 전쟁]] 당시의 전열보병식 전투로 이루어진 경우가 상당히 많았다. 남북전쟁 이전의 몇몇 군사이론가들은 이론상 [[미니에 탄]]과 강선식 머스킷 총이 기존의 활강식 머스킷 총보다 사거리가 늘어나고 정확해졌다는 이유로 보병 전술의 혁명을 예언했고 전투가 더 빨리 시작되고 더 넓은 지역에서 벌어질 것으로 예상했다.[* 아마도 그들은 20세기 방식의 [[타넨베르크 전투#s-3|회]][[솜 전투|전]]을 예측한 것 같다.] 하지만 정확도를 수백미터 단위로 늘렸는데도, 상당수의 남북전쟁의 보병전은 지근거리에서 벌어진 경우가 많았다. 113개 전투를 표본으로 하면 이 중 62%의 교전이 100야드(91m)내에서 이루어졌다.[* 출처: 전쟁의 재발견, 마이클 스티븐스 저. 개인화기가 극도로 발전한 현대전에서도 보병들끼리의 교전은 의외로 근거리에서 벌어지는 사례가 많다. [[육군과학화전투훈련단|KCTC]]에서 지금까지 벌어진 보병 교전을 분석한 결과 주간 전투 평균 교전거리 50m 이내 70%, 100m 이내 30%, 공격자 평균 48m, 방어자 평균 51m에서 교전이 벌어졌다.] 아마도 시야가 불분명한 경우도 꽤 많았을 뿐더러 병사들이 사격을 잘 못하거나 실수를 할 가능성 등 여러가지 요소 때문에 그 당시 지휘관들은 근접해서 쏘는 것을 선호하였다. [[미니에 탄]]을 쏘는 총도 [[전장식]] [[머스킷]]이었고, 한 발 쏘면 재장전이 오래 걸렸기 때문에 신중히 쏴야 했다.[* 현대전에서도 탄약이 부족할 경우, 최대한 근접해서 쏘는 것을 선호한다. 더욱이 당대 사용되던 흑색화약은 매연이 많이 나오기 때문에 한발만 일제사격해도 시야가 많이 가려졌다. [[내셔널 지오그래픽]] 채널에서 방영한 롱 웨이 홈(Long Way Home)이라는 [[이라크전]] 배경의 실화 드라마에서 [[분대장]]이 분대원들이 고립되어 탄약이 고갈될 위험에 처하자 150m 밖의 적은 쏘지 말라고 명령하는 장면이 있다.] 물론 결과는 막대한 사상자의 발생이었지만, '''[[철도]]의 존재로 기계화된 보급 수송수단'''을 가진 관계로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막대한 양의 물자와 병력을 전투에 투입 가능했던 전쟁이기도 하다. 최초의 [[장갑열차]]와 [[열차포]]도 이 때 등장하였다. 그런가 하면 국가의 모든 능력을 전쟁에 동원한다는 '''[[총력전]]'''의 개념이 처음으로 서기도 했고, 상대국의 전쟁수행능력 자체를 목표로 삼아 전략적으로 공격하는 행동 양상도 이때 생겨났다. 이 '바다로의 진군'을 수행한 셔먼 장군을 최초의 현대전을 지휘한 장군으로 평가하는 문서는 유럽에서도 종종 나올 정도. 심지어는 최초의 [[철갑선]]끼리의 포격에 [[잠수함]]까지 등장했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의 프랑스 총리 [[조르주 클레망소]]가 이 시기 미국을 방문하여, 최초의 현대전이 총력전으로 가고 있음을 체험했을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그가 이끈 프랑스는 비슷한 행동과 비슷한 대응들이 이어졌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