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남북전쟁 (문단 편집) ==== 1862년 초: 반도 전역 ====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800px-PeninsulaCampaign.png|width=100%]] 1862년 북군의 동부 전역 주력인 포토맥군의 사령관 조지 매클레런은 북군의 압도적인 해상 우세를 활용, 체서피크 만 건너편의 포트 먼로에 북군을 상륙시켜 남부 수도 [[리치먼드(버지니아)|리치먼드]]를 직접적으로 위협하려 했다('''반도 전역''': Peninsula Campaign). 링컨은 워싱턴이 노출된다는 점을 들어서 반대했으나,[* 전략적으로는 매클레런이 옳았고 링컨이 틀렸다. 지형적으로 버지니아를 관통하는 루트는 매우 위험하고, 동서로 흐르는 강이 많아 방어하는 측에게 지리적으로 딱 좋은 반면, 해상에서 돌입하는 상륙작전은 더 안전하고 더 적은 피해로 리치먼드까지 진군할 수 있었다. 후임인 미드나 그랜트도 이쪽을 선호했으나, 이미 전임자가 실패한 마당에 링컨이 까라면 까라고 해서 어쩔 수 없이 오버랜드 캠페인을 시작하게 된다.] 결국 수용하게 되었다. 초기 전투에서 매우 조심스러운 성향의 남군 사령관이었던 조셉 존스턴은 방어하기 불리하다는 걸 깨닫고 지속적으로 후퇴했으며, 포토맥군 사령관 매클레런 역시 남군의 방어선을 돌파하는 돌격전술을 시행하기 보다는 말려죽이는 포위전술을 구사하면서 별다른 전투없이 남군은 리치먼드 코 앞까지 몰리게 됐다. 이렇게 반도 전역이 불리하게 돌아가자, 남부 대통령 [[제퍼슨 데이비스]]는 1862년 6월 1일, 하루 전날 벌어진 세븐 파인즈 전투[* 양쪽 모두 피해가 비슷비슷하며 전술적 피해가 크게 차이나진 않았지만 북군은 그 자리에서 진출을 멈추고 눌러앉는다.]에서의 존스턴의 부상을 핑계로 웨스트 버지니아에서는 실패했지만 더 공격적인 [[로버트 E. 리]]를 사령관으로 삼는다. 이처럼 상황은 북군에게 상당히 유리했고 제1차 불 런 전투 이후 다시 한번 북군은 남군의 주력을 격파하고 전쟁을 조기에 끝낼 기회를 얻었다. 하지만 매클레런은 자신이 놓인 상황을 오판하고, 9만명 규모의 남군을 2배인 20만명으로 13만명 규모의 포토맥군보다 더 많다고 생각하여 링컨에게 지속적으로 추가 병력을 요청했다. 이에 따라 북군은 앞선 불 런 전투가 치루어졌던 매너서스 정션에 방어군을 남기고 웨스트 버지니아와 매릴랜드 일대에 분산되어 있던 병력들을 셰넌도어 계곡을 통해 움직여 풍족한 곡물지대를 점령하면서 리치먼드 동쪽에 포위망을 구축하고 있던 포토맥군과 함류하기 위해 남하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앞서 제1차 불 런 전투에서 스톤 브릿지를 방어해낸 토마스 잭슨이 이끄는 남군이 과감한 기동을 통해 각개 기동하던 북군을 전부 요격해버렸다(잭슨의 계곡 전역). 북쪽으로부터 위험이 제거되자 로버트 리의 남군 주력 북버지니아군은 과감한 기동을 통해 반도 전역의 일부인 7일 전투(6월 25일 ~ 7월 1일)에서 북군에 충격을 준다. 이 7일 전투에서 남군을 과대평가하고 소극적으로 나오던 매클레런은 앞서 오판한 대규모 남군이 공세중이라고 판단하고 질서정연하게 철수하기 시작한다. 이 과정에서 리는 과감히 북군을 공격하지만 잘 짜여진 북군 후미 대형의 방어 탓에 엄청나게 큰 피해를 입었다. 전술적으로는 남군의 피해가 더 컸던 7일 전투였지만 어쨌든 수도 리치먼드 인근에서 어느정도 북군을 밀어내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상황은 여전히 압도적으로 북군에게 유리했다. 7일 전투 과정에서 남군은 지속적으로 매클레런이 잘 만들어놓은 방어적인 진형에 저돌적인 공격을 계속 감행해서 피해가 누적된 상황이었고 북군은 여전히 수적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매클레런은 상대를 과대평가해 남군 20만명이 있으니 지원군을 보내달라고 하면서 대규모 반격을 주저한다. 매클레런의 지지부진한 전과에 화가 많이 난 링컨은 7월, 매클레런에게 후퇴를 명령한다.[* 매클레런이 조금만 용기가 있었거나, 링컨이 조금만 참을성이 있었어도 전쟁은 여기서 끝이었다. 리치먼드-피터스버그 철도는 북군에게 노출되어 있었으며, 몇 마일을 더 물러나긴 했지만 여전히 북군은 리치먼드를 위협하고 있었다. 거기다 [[https://ko.wikipedia.org/wiki/%EB%AA%A8%EB%8B%88%ED%84%B0%EC%99%80_%EB%A9%94%EB%A6%AC%EB%A7%A5_%ED%95%B4%EC%A0%84|모니터와 메리맥 해전]](1862년 3월)의 성공으로 제해권을 장악한 북부 해군 덕택에 매클레런은 보급에 지장이 크게 없었으며, 남군의 보급 항구들은 하나 둘씩 북부 해군의 손아귀에 떨어지고 있었다. 즉 매클레런이 슬금슬금 다시 리치먼드-피터스버그를 포위하고 그냥 거기서 죽치고 있었을 경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계속해서 북군을 몰아내기 위해 잘 짜여진 진형에 돌격하여 2:1 교환비를 강요당하던 남군 입장에서는 답이 없던 상황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