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남북전쟁 (문단 편집) ==== 1861년 ==== 전쟁 초반 동부 전역의 남군은 고향을 지키겠다는 열의로 모인 병사들과 명장 [[로버트 E. 리]] 장군 등으로 대표되는[* 의외지만 리는 초창기에는 패전을 경험했고 한동안 참모장 격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 리가 전면에 나서게 되는 것은 데이비스 대통령과 손발이 잘 맞는다는 면에서 발탁된 반도 전역부터이다. 하지만 그전에도 남군의 존스턴, 보우리가드, 잭슨, 롱스트리트 같은 지휘관들은 대체로 북군 지휘관들보다 우수했다.] 우수한 지휘관들의 기여 등에 힘입어 승승장구했다는 이미지가 있는데, 웨스트 버지니아의 이탈을 막지 못했으며, 잭슨의 계곡 전역의 성과는 눈부시기는 했지만, 결국 북군의 공세를 저지하는데 그쳤고[* 이것만 해도 3배가 넘는 군대를 상대로 대단한 업적이기는 하다.] 워싱턴 D.C.를 위협하는 수준까지는 미치지 못했다. 특히, 반도 전역은 로버트 E. 리의 전략적 승리임이 분명하나 이 와중에 매클레런을 상대로 비슷한 병력을 가지고도 2배에 달하는 사상자를 내었다. 전쟁 초기 남군이 버지니아를 탈퇴한 웨스트 버지니아를 점령하기 위해 움직이면서 전장은 웨스트 버지니아 일대가 되었다. 하지만 북군은 윌리엄 S. 로즈크랜스의 지휘하에 남부 민병대의 공격을 전부 요격해내는데 성공한다. 로즈크랜스의 상관이었던 매클레런은 이후 전쟁 내내 보여주게 될 모습처럼 상대 전력을 과대평가한 나머지 소극적으로 움직였는데, 더 적극적이었던 로즈크랜스가 세운 주요 전공을 자신의 공으로 포장하였다. 이는 매클레런이 핵심 야전군 포토맥군 사령관과 연방군 총사령관까지 오르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한편 로버트 E. 리는 그가 지휘한 첫 번째 전투였던 치트 산 전투에서 산 위의 연방군을 포위하려 했으나 예하 부대들의 공조가 이루어지지 않아 실패하였고, 대서양 연안 방위를 맡는 한직으로 좌천되었다. 이후 리는 리치먼드 주변의 방어 시설을 건설하기도 했고, 언론은 그가 삽질만 한다며 비꼬았지만 리의 진지 구축은 이후 피터스버그, 리치먼드 방어전에서 큰 도움이 되었다. 군단급 부대들이 벌인 첫 회전은 전쟁 발발 3개월만인 1861년 7월 1차 불 런(매너서스) 전투였다. 웨스트 버지니아에서 승리를 거두며 사기가 오른 북군은 알렉산드리아에 있던 맥도웰의 3만 5천 전력과 찰스타운 부근에 주둔 중이었던 패터슨의 1만 8천명의 병력을 투입하여 남부연합의 수도인 리치먼드를 점령하고 조기에 전쟁을 종결시키려 하였다. 당시 리치먼드와 워싱턴 D.C. 사이에서 남군은 뷰리가드 휘하 2만 3천명 규모의 병력과 존스턴의 지휘 아래 셰넌도어 계곡에 주둔하던 1만 2천명의 병력을 배치하고 있었는데 북군은 수적 우세를 활용하여 이들을 꺾으려했던 것이다. 하지만 주력이었던 맥도웰이 이끄는 부대는 지나치게 행군속도가 느렸고[* 당시 연방군은 민병대에 크게 의지하고 있었다. 막 전쟁이 개전한 시점이고 전쟁 자체를 북부는 크게 심각하게 여기지 않은 나머지 3개월로 계약기간을 정해놓았다. 그러나 운이 없게도 제1차 불 런 전투는 전쟁 발발 3개월 시점이라 정확히 민병대 계약 만료기간이었다. 전역을 코앞에 앞둔 민병대는 당연히 전투에 나서는데 적극적이지 않았고 맥도웰 역시 이런 민병대를 장악하는 능력이 부족했다.] 찰스타운의 패터슨은 존스턴이 기습할 것을 우려해 움직이지 않았다. 그 사이 존스턴은 전쟁초기 쥐고 있던 철도를 활용하여 부대들을 신속하게 이동하기 시작한다. 북군의 기동이 지나치게 느렸던 덕에 남군은 시간을 벌었고 유능한 사단장이었던 [[토마스 잭슨]]이 뷰리가드의 우측방인 헨리 힐을 노리고 스톤 브릿지로 몰려든 북군의 맹공을 끝까지 버텨낸 것에 더해, 존스턴의 남군 지원군이 철도를 통해 도착해서 전장에 가세하며 전세를 뒤집었다. 또한 북군은 어리석게도 포병대를 남군 보병 앞에 전진배치하여 그대로 피탈당했고 당시 제복이 통일되지 않은터라 남군의 총돌격에 아군인줄 착각했다가 조기 대응에 실패하며 완전히 붕괴된다.[* 토마스 잭슨은 이 덕분에 스톤월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러나 이 와중에 잭슨은 부상을 입었으며, 그의 사단은 50%가 넘는 피해를 입었다.] [[https://en.wikipedia.org/wiki/Western_Virginia_campaign|웨스트 버지니아 전역]]의 성공 때문에 전투 직전까지도 전쟁이 앞으로 몇 달이면 끝날 것이라 내다볼 정도로 전황에 낙관적이었던 연방 수뇌부는 큰 충격에 빠진다. 경제력도, 인구 수도 북부에 상대가 안되는 남부 농사꾼들의 반란이니 간단하게 끝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분위기가 충격과 패배주의에 빠지게 되었고, 전투를 구경하기 위해 소풍을 나왔던 많은 북부인들이 후퇴하는 [[모랄빵|패잔병들과 패닉 상태에 빠져 워싱턴으로 도망친 일화]]가 유명하다. 하지만 남군 역시 [[버지니아 주]]를 침공한 북군을 격퇴하기는 했으나, 결정적인 피해를 주는데 실패했다. 이때는 양쪽 군인들이 다 경험이 부족하고 훈련이 덜 된 상태였다. 남부는 전투에 이겼음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사상자를 냈기에 이겼지만 북군을 추격하여 전과를 확대하지 못한다. 남부연합의 대통령이었던 제퍼스 데이비스는 존스턴과 뷰리가드에게 공격을 촉구했지만 사상자와 더불어 때마침 내린 비로 인해 워싱턴 D.C.까지의 기동로가 엉망진창이 되며 결정적인 기회를 놓치고 만다. 이처럼 북부, 남부 양쪽 다 충격을 받은 전투였고, 양측은 전쟁이 예상보다 훨씬 길고 잔혹해질 것을 깨닫게 되었으며, 병력을 더 모집한다. 링컨은 1차 불 런 전투에서 패배한 이후인 8월 20일 셰넌도어군의 맥도웰 대신 웨스트 버지니아 전역에서 남군을 상대로 승리를 거둔 조지 매클레런을 재편성된 주력군인 포토맥군의 사령관에 임명한다. 매클레런은 앞선 1차 불 런 전투에서 패배한 이후 사기가 떨어진 북군을 성공적으로 재건했고 의회에서도 링컨의 전쟁 정책에 지지하는 여러 법안을 통과시킨다. 11월, 매클레런은 의회에 압박을 넣어 자신과 대립하던 북군 총사령관 윈필드 스콧을 은퇴시키고 자신이 총사령관까지 겸하게 되었다. 하지만 매클레런은 여전히 남군 병력이 자신보다 많다고 믿고 있었고, 1861년의 남은 기간 내내 남군을 상대로 먼저 전투에 나서지 않았다. 링컨과 행정부는 빨리 진격하라고 매클레런을 계속 압박했고, 매클레런은 부하들이나 통수권자 링컨을 무시하는 오만한 행보를 보였다. 정작 남군을 지휘하던 신중한 조셉 E. 존스턴은 워싱턴 주변까지 진격한 남군의 위치가 방어하기 불리하다고 여겨 먼저 후퇴한 뒤였다. 1862년 초 매클레런이 드디어 움직이기 시작했을 때, 매클레런이 10만 남군이 온갖 방어 준비를 끝마쳤을 거라고 장담한 매너서스에서는 훨씬 적은 수의 남군의 흔적과 더불어 통나무로 만든 가짜 대포(Quaker Gun)만 발견되어 매클레런은 망신을 당했다. 연방 수뇌부에서는 매클레런을 서서히 불신하기 시작했지만, 매클레런은 군 조직을 만들고 재건하는 데 있어 뛰어난 능력을 발휘했고 일반 병사들도 그를 매우 좋아했으며, 정치인들과의 연줄도 있었기 때문에 해임하기 어려웠다. 한편 개전과 동시에 노퍽을 비롯한 주요 해군 거점을 상실한 북부 해군은 빠르게 포함과 장갑함을 위주로 재건을 성공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윈필드 스콧이 최초 계획한 아나콘다 계획을 실행하기 시작한다. 아나콘다 계획에 따라 연방 해군은 기존의 해군을 브라운 워터 네이비, 즉 강상해군과 블루 워터 네이비, 즉 해양 해군으로 나누었고 큰 규모의 주력함을 블루 워터 네이비에, 그리고 상대적으로 작지만 기동력이 좋은 포함들을 강상 해군에 배치하고 주요 남부 무역항과 군사항구를 공략했다. 이 과정에서 북부 해군은 미시시피 강 하류의 뉴올리언스를 함락시킨데 이어 버지니아 노퍽 기지로 들어가는 주 통로인 햄프턴 로드를 공략하는 데 성공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