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남북전쟁 (문단 편집) === 섬터 요새 전투: 전쟁의 개막 === "갈라진 집안은 바로 설 수 없다"며 강력한 연방 유지파임을 천명했던 링컨은 취임식에서 남부에 대해 탈퇴를 취소할 것이며 불응시 무력사용을 불사하겠다는 경고를 보냈고, "[[성조기|우리 깃발]]에서 별이 하나라도 줄어드는 일이 벌어진다면 난 죽어버리고 말 테다"라는 말을 공공연히 하고 있었다.[* 미국 깃발에서 별은 연방의 주 숫자만큼 존재한다. 별이 줄어든다는 것은 주의 연방 탈퇴를 의미한다.] 여기에 반발한 남부는 자국 내 연방군의 철수를 요구하며 국내의 연방군 요새와 병기창 등을 차례로 무력점령한다. 하지만 그 중 한 곳의 요새를 점령하는데 실패하였으니 바로 [[사우스 캐롤라이나]] 주의 찰스턴 항 인근에 있는 섬터 요새의 연방군이었다. 본래 찰스턴 항에 기지를 두고 있던 이들은 남부연합의 민병대가 빠르게 다른 연방군 요새들을 점령하기 시작하자 가족들을 북부로 돌려보내고 섬터 요새로 들어가서 농성을 벌이기 시작한다. 남부연합의 대통령 제퍼슨 데이비스는 웨스트포인트 교장이었지만 고향 루이지애나가 남부로 붙자 남부 연합에 가담한 피에르.G.T 뷰리가드 준장을 보내 이들을 포위, 철수를 압박하도록 하였다. 뷰리가드 준장은 섬터 요새의 연방군 지휘관이었던 로버트 앤더슨 소령의 제자였기 때문에 여러차례 사절단을 보내 철수할 것을 권고했으나 앤더슨 소령은 거부한다. 하지만 앤더슨 소령과 섬터 요새의 영웅적인 농성에도 연방군은 식량을 공급받지 못하고 있다는 약점을 가지고 있었다. 북부 언론이 앤더슨 소령의 농성을 띄우고 있을 때 백악관에서는 섬터 요새를 포기할지 유지할지에 대해서 갑론을박이 오갔다. 문제는 섬터 요새가 강 한가운데 위치해있고 남군이 포병대로 포위하고 있던 터라 보급선을 그냥 보낼 수 없었다. 보급선을 보내기 위해서는 반드시 해군 선박을 같이 동원해야 했는데 잘못하면 이는 남부에게 전쟁을 도발하는 행위가 될 수 있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수뇌부 인사들은 철수를 주장했다. 하지만 링컨 대통령의 강한 의지로 소수의 해군 병력을 동원하여 보급을 강행하기로 결정하고 이를 사우스 캐롤라이나 주지사에게 통보한다. 당연히 이를 들은 제퍼슨 데이비스는 북군이 보급을 받을 경우 지속적으로 농성도 가능해지고 분리독립을 주장하고 있는 남부의 위신이 떨어지기에 강공을 지시하였다. 결국 1861년 4월 12일 연방군 해군의 접근을 감지한 남군이 04시 30분을 기점으로 포격을 실시하며 남북전쟁이 발발한다.[* 놀랍게도 공격개시에 대해서 엄격한 보안이 이루어지지 않았는데 찰스턴에서는 4월 12일 새벽에 있을 불꽃 놀이쇼를 보러오라며 광고했고 많은 시민들이 연방군의 섬터 요새를 포격하는 것을 구경했다.] 이때 섬터 요새에서의 에피소드 하나. 섬터 요새는 남군의 맹렬한 공격을 받았지만 워낙 요새가 튼튼해서 사상자는 없었다. 하지만 탄약이 다 떨어지고 요새도 크게 파손되자 연방군 지휘관인 로버트 앤더슨 소령은 더 이상 버틸 수 없다고 판단하고 요새를 포기하기로 했다. 대신 요새를 포기하는 대가로 북군 병력이 무사히 철수하는 것을 남군에게 허락받았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발생했다. 깃대에서 성조기를 회수하며 연방군 포대가 예포를 발사했는데, 이때 폭발 사고가 나서 1명이 사망하고 3명이 부상당하는 등 연방군에서 사상자가 발생한 것이다. 이로 인해 남북전쟁의 최초 사망자는 교전이 아닌 폭발 사고로 인한 것이라는 특이한 기록을 남기게 되었다(요새와의 교전에서 남군의 피해는 전무했다). 참고로 교전으로 인한 최초의 사망자도 연방군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