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남북관계 (문단 편집) === 해방 이전 === 흔히 평안도와 한양의 지역감정을 남북관계에 결부시키는 시각이 많다. 그러나 [[대한민국/지역감정]] 문서에서 보듯 한양의 권세가와 이에 동조하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평안도의 인근 사람들이 신분질서를 무시하면서 신분이 낮으니[* 명문가가 아닌, 몰락 양반 등 나머지 모든 신분을 포괄하는 개념이다.] 차별하는 형태였다. 아주 간단히 요약하면 북쪽의 사람들 중 신분이 높은 사람들은 [[몽골 제국|몽골]]이나 [[홍건적]] 등 외세의 침략으로 거의 자취를 감추어 신분이 낮은 사람만 남게된 것이다. 한양 명문가에 지방 출신이 밀리는 풍토에 정치적으로 출세가 어려운 것 말고는 경제, 문화적으로 무난히 교류했다. 근현대사에 대한 교육이나 북한 땅의 토속문화에 대한 것이 남북관계에 대한 문제로 제대로 교육이 되지 않는 관계로 젊은 세대 중 역사에 관심이 없으면 정말로 한민족으로 살았다는 것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기도 한다. 즉 [[삼수갑산]]이나 [[봉산탈춤]], [[살수대첩]] 등으로 북한 땅에 관련되거나 그곳에서 있던 이야기를 듣는데, 이게 북한에 있는 곳을 두고 하는 말인 줄 모르는 경우가 많다. '살갑기는 [[평양]] 나막신'이라든가, '[[북청]] 물장수'처럼 북한 땅의 풍속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도 많았다. [[심청전]], [[임꺽정]], [[가루지기]]의 이야기는 현재의 휴전선을 넘나드는 이야기다. 평안도 출신 마라토너이던 [[손기정]]은 민족적인 영웅 취급을 받았고, 시인 [[백석(시인)|백석]]은 남쪽의 통영에 대한 긍정적인 내용의 시를 쓴 적도 있다. 분단 이전 북한에 해당하는 지역은 신분 질서가 약하고 상업이 중시되고 유교 질서가 약한 등 신분 사회이자 상업을 억제하고 실질적으로 유교적 질서가 강조되는 현대 북한과 성향이 정반대였다. 한양 북촌 사람이 한양 남촌 사람을 차별하는 등 신분이 높은 사람은 낮은 사람을 차별했고, 반대로 신분이 낮은 사람끼리는 [[홍경래의 난]]에 대한 충청도 출신과 제주도민의 동조와 [[동학농민운동]]에 대한 동조 등 뜻을 같이 하기도 했다. 가장 단순하게 생각해보면 [[한국전쟁]] 당시 대한민국이 북한에 해당하는 지역을 통일시키기 위해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하기도 했다. 지금과 같은 분단 자체는 해방 직전까지 남북한의 누구도 전혀 생각하지도 못했다. 심지어 분단 이후에도 곧 통일될 것이라고 여기던 증언이 많았고, 실향민들이 이를 믿어 휴전선에 가까운 곳에 살기도 했다. 1960년에는 서울 시민 중 최소 10% 이상은 이북 출신이고, 휴전 직후에는 인천의 경우 무려 28%의 인구가 이북 출신이었다고 한다. 1971년만 해도 [[이산가족]]이 남북한에서 천만명이고, 이들의 8촌까지 하면 남북한 모든 주민이 서로 혈연관계로 연결된다는 말까지 있을 정도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