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남방작전 (문단 편집) === 일본군 === 사실 남방작전은 처음부터 여러가지 문제점들을 내포하고 있었다. 우선적으로, [[진주만 공습]]이 성공해야 한다는 가장 큰 전제가 무너지면 모든 작전이 실패로 끝날 수도 있었다. 일본으로선 다행히도 진주만 공습이 성공하여 첫 고비는 넘겼지만, 이제부턴 그보다 더 큰 문제들이 산적해 있었다. 당장 일본이 점령해야 할 지역이 '''너무 넓었다'''.[* 동남아시아의 섬들은 '''2만 6천여'''개다.] 영국의 동아시아 최전선기지인 '''[[영국령 홍콩]]''', 영국 동양함대의 기지이자 [[유럽]]에서 [[태평양]]으로 들어오는 가장 중요한 길목인 '''[[싱가포르]]''', 미국의 서태평양 주요 기지들이 자리잡고 있던 '''[[필리핀 자치령]]''', '''[[괌]]''', '''[[웨이크섬]]''', 동남아 최대 석유 산지인 '''[[보르네오]]''', 여기에 주요 항로를 장악하려면 [[자바 섬]]과 [[수마트라]] 섬도 덤으로 점령해야 했다. 동남아 유일의 독립국인 [[태국]]이 어떻게 움직일지도 알 수 없었으며, 태국과 인도차이나를 방위하기 위해 버마까지 장악해야 했다. 이 정도의 규모면 [[나치 독일]]의 바르바로사 작전 수준의 규모였으며, '''두 국가 모두 이 거대한 작전을 성공적으로 완수하고 점령지를 유지하기에는 국력이 한참 부족'''했다.[* 그래도 나치 독일이 상황은 일본보다 나았던 게 소련은 대륙이지만 동남아시아는 인도차이나 반도를 제외하면 대부분 섬들이다. 독일군이야 공군이 제공권을 잡은 후 육군이 진격하면 되었지만, 일본군은 공군이 제공권을 잡은 뒤 해군이 제해권을 잡고 육군이 상륙작전을 실행해야 되는데, 이걸 수없이 반복해야 했다.][* 점령지를 유지하고 관리하기 위한 독일의 역량이 부족했다는 말은 엄밀히 말하자면 틀린 말이다. 동남아시아와 달리 동유럽은 독일 본토와 가까웠고 인프라도 잘 깔려 있었다. 무엇보다도 [[이오시프 스탈린|스탈린]]의 폭정으로 인해 대규모 민심이반이 발생해 잘만 하면 [[동유럽]]을 안정적으로 통치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좋은 기회를 [[나치즘]]이라는 배타적인 이념으로 무장한 독일은 태생적으로 살려낼 수 없었고, 결국 현지 민심을 무시하고 동유럽 민족들을 탄압한 [[파르티잔|대가]]를 제대로 치르게 된다. 다만 우크라이나와 발트 해 쪽은 예외로, 이들 동네는 [[우크라이나 대기근|워낙에 반소련]] [[발트 3국 점령|감정이 심해서]] 1945년까지 친독 파르티잔이 버젓이 활동했으며 독일군에 자진입대하는 사람들까지 있었지만 전쟁 말기 일본은 이런 것도 없었다.] 안 그래도 이미 중국과 끝이 보이지 않는 기나긴 전쟁 중이었던 일본이, 아무리 길게 잡아도 1년, 짧게 잡으면 반년 정도만에 이 광대한 지역을 모조리 점령한다는 건 아무리 연합군이 약체화되어 있다 해도 어려운 일이었다. 더군다나 홍콩의 영국군만 2만, 말레이 반도와 싱가포르에만 10만, 필리핀에도 약 15만에서 20만이라는 어마어마한 병력들이 방어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해군력도 미국 태평양 함대를 제외하더라도 전함 2척을 중심으로 하는 영국 동양함대가 싱가포르에 배치된 상태였고, 필리핀에 전개한 미국 아시아 함대와 동인도제도에도 네덜란드 잔존 함대가 버티고 있었다.[* 아시아 함대와 네덜란드 해군은 둘 다 잠수함을 주력으로 삼고 있었다.] 다음으로 동원할 수 있는 육상병력에도 큰 한계가 있었다. 이미 일본 육군은 [[중일전쟁]]과 [[만주국]] 유지를 위해 100만에 가까운 병력이 [[중국 대륙]]에 묶여 있는 상태였다. 전투에서는 우세를 점하고 있었지만, 광활한 중국의 영토 덕분에 점령지역의 확보를 위해서라도 현지에서 계속 병력 충원을 요청하는 상황이었다. 결론적으로 일본 육군은 남방작전에 따로 돌릴만한 병력 자체가 크게 모자랐다. 그리고 더 큰 문제는 일본 자체의 해상수송능력 및 보급 능력의 한계가 있으므로 그나마 일본 육군이 남방작전으로 전환할 수 있는 병력보다 더 적은 병력만 수송 및 보급이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일단 대본영의 추산으로도 전투 병력은 최대 12개 사단 정도만 동원 가능하다는 보고가 올라올 지경이었다. 그나마 일본 해군은 대부분의 병력과 장비를 동원할 수 있으나, 워낙 작전 지역이 넓고 일본 본토 등도 수비해야 할 이유도 있으므로 실제 각각의 작전지역에 투입되는 함선은 그렇게 많지 않거나 동원가능 기간이 심하게 짧았다. 즉, 일본군은 적은 병력을 가지고 최대한 신속하게 각지에 분산된 연합군을 각개격파하면서 주요 전략 거점들을 일일이 하나하나 빠르게 점령해 나가야 했다. 때문에 얼마 안 되는 일본군 내 소수의 상식인들은 '''"상식적으로 그게 말이 되는 소리냐?"''', '''"[[팩트폭력|연합군은 다 바보인 줄 아냐?]]"''' 등의 회의론으로 자국의 미래를 염려했으며, 실제로 [[히로히토]] 천황도 "중국 땅도 넓은데 태평양은 그보다도 더 넓지 않은가?"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그러나 눈앞에서 기다리는 동남아시아의 과실들에 눈이 먼 경직된 군 수뇌부는 '''이러한 염려들을 깔끔하게 기억 속에서 지워 버렸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