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남명 (문단 편집) === 내부 분열 === 사실 남명도 과거 동진과 남송이 그러했듯 [[장강]]을 방어선으로 삼고 청나라의 남진을 막는 전략을 폈다. 북방 출신으로 [[해전|수전]]에 상대적으로 약한 청군이 장강을 건너 화남 지방으로 내려오기란 사실 어려운 일. 그런데 베이징 함락 뒤 겨우 1년 만에 1645년 4월 남경이 다시 함락되었으니 충격적이었다. 여기에는 청군에 투항한 한족 출신 장수 및 군대가 많았다는 점과 함께, 남명 스스로가 내분으로 멸망의 길을 열어젖힌 것이 가장 크다. 1645년에 당시 남명은 장강 방어선 곳곳에 장수와 병력을 주어 청군의 침공에 대비했는데, 문제는 이 와중에 가장 규모가 컸던 좌량옥(左良玉)이 남명 조정 실권자인 마사영(馬士英)과 갈등을 빚었다는 것이다. 물론 이건 남명 조정의 문제보다 좌량옥의 탓이 컸다. 좌량옥은 권력욕이 매우 넘쳐 흘렸는데, 문제는 국가위기상황에서도 그 권력욕을 주체하지 못했으며 마사영과의 관계도 최악이었다는 것이었다. 좌량옥의 권력욕은 황당한 사기극으로 폭발했다. 홍광제 즉위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숭정제의 태자 주자랑임을 주장하는 인물이 나타났다. 수많은 사람들, 심지어 홍광제조차 속아 넘어갈 뻔하였으나 주자랑을 가르친 적이 있는 왕탁이라는 신하가 가짜임을 간파했다(남태자 사건). 그러나 세간에는 홍광제가 제위 유지를 위해 정통성을 위협하는 주자랑을 제거하려 했다는 소문이 떠돌았는데, 좌량옥은 이를 이용하여 마사영의 남명 조정을 치는 반란을 일으킨다.[* 남태자 사건에 대해서는 우연히 일어난 사건이고 좌량옥이 이를 이용했다는 설, 좌량옥이 계획적으로 준비했다는 설이 있다. 남명 시기의 혼란이 워낙 심한지라 어느 쪽 모두 확실한 근거가 없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