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남만주철도주식회사 (문단 편집) == 개요 == 줄여서 만철(滿鐵/, まんてつ, 만테츠).[* 같은 작명법으로 [[조선총독부 철도국]]은 선철(鮮鐵, せんてつ, 센테츠)이라고 하였다.] [[철도]]를 경영하며 [[만주국]]을 지배했던 만주의 [[동인도회사]]였다. 처음에는 [[일본 제국]] 정부가 주식 50%를, 민간이 나머지를 가졌으나, 이후 정부가 지분 전체를 보유하며 [[공기업]]처럼 변한다. 1906년 일본은 [[러일전쟁]]에서 승리하며 [[랴오둥반도]]는 [[러시아 제국]]으로부터 넘겨받게 된다. 이 때 할양받은 철도[* 중동철도 창춘 - 뤼순구간으로 이 구간을 남만철도(南滿鐵路)로 이름을 바꾼다.]와 [[남만주철도부속지]]를 바탕으로 설립되었으며, 초대 총재는 [[대만총독부]]의 민정장관으로 식민지 정책을 총지휘했던 문관 출신의 고토 신페이(後藤新平)였다. 만철의 설립 자체가 [[러일전쟁]] 중 만주군 총참모장 [[고다마 겐타로]]가 고토 신페이의 영향을 받아 헌책한 계획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 요지는 철도 경영을 빙자해 제국주의적 정책을 시행함으로써 대륙에서의 국익을 도모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취지에 따라 만철은 철도를 기반으로 광산, 항만, 정유, 유통, 제조, 출판, 교육, 의료 등 다양한 분야로 뻗어나가 '''만주국의 경제를 장악하였다.''' 단순한 철도 회사가 아닌 관동군과 더불어 만주를 지배한 한 축의 세력이었던 것이다. [* 이렇게까지 극단적인 형태는 아니라도 철도회사가 여러 분야에 손을 대는 경우는 많다. 일본의 수많은 사철기업을 모태로 한 기업집단들은 말할 것도 없고, 공기업인 일본국유철도 또한 버스나 해운업, 통신과 병원 운영에도 관여하고 있었다. 지금은 많이 정리된 편인데, 유럽에서도 철도 공기업들이 다른 분야의 산업에 관여하는 일이 역사적으로 적지 않았다. 한국의 철도청도 저런 식으로 운영되던 조선총독부 철도국의 유산을 물려받았기 때문에 한때 버스 사업, 요식업과 호텔 사업에서 지분을 가지고 있었으나, 외국과 달리 철도에 전업할 것을 계속 요구받으며 타 사업분야는 계속 민간에 불하돼서 오늘날과 같은 형태로 굳어졌다. 오히려 [[한국철도공사]] 출범 후의 코레일 유통 등의 설립으로 여러 산업에 손을 대는 기업집단으로 돌아가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이게 이렇게 되는 데에는 산업화 초기의 상황을 생각해보면 된다. 산업혁명 이후 산업화는 당연 산업단지로의 도시 집중화, 물류의 대량 수송이 필연적인데 자동차의 발전이 늦은 당시에는 '''철도'''가 가장 중요한 운송수단이 됨과 동시에 철도를 놓는 토지의 확보 또한 중요했다. 주요 철도역 인근은 소위 역세권으로 도시화의 핵심이 되어, 당연 철도회사는 철도부지와 역세권을 관리하는 '''부동산 회사'''로의 역할을 동시에 하게 되며, 이게 더 발전하면 아무것도 없는 황무지급 토지를 싼 값에 매입한 후 자사의 철도와 연결시킨 후 역세권으로 개발해 비싸게 파는, 즉 '''부동산 개발회사'''의 역할까지 하고 여기서 더 나가면 개발된 역세권 토지를 단순히 매각해서 시세차액만 보는 것이 아닌, 해당 토지에 호텔이나 백화점 등 상업 업무시설까지 직접 건설 및 경영까지 하게 된다. 당시의 철도회사가 여러 분야에 손을 댔던 배경이다.] 그 거대한 스케일에 비해 직접 운영한 철도노선은 의외로 짧다고 할 수 있는데, 그러면서도 굵직한 노선들을 운영했다. 창춘시(신경) ~ 다롄시 구간의 701km이 주 간선이었고, 그 다음으로 굵직한 노선이 쑤자툰 ~ 신의주 노선이었다. 함북선 남양 ~ 나진 구간의 전신이 되는 북조선선도 단독 선구로서 운영했다. 그 외 창춘시 ~ 하얼빈시 구간을 포함한 광대한 만주 철도망은 만주국 국유철도가 직접 운영했다. 다롄시에서 창춘시를 넘어 만주국 국유철도가 운영하는 하얼빈시에 이르는 구간에서는 아시아의 최고속으로 유명한 특급열차 '아시아'가 운영되기도 했다(1932~1943). 1920년대에는 [[일본 정부]]의 1년 세입의 4분의 1에 달하는 막대한 연간수익을 기록하였을 정도로 규모가 거대화되었다. 실제로 만철은 1923년 부터 일본제국이 패망하는 1945년 사이에 일본제국 내의 모든 법인 중 자본금 규모 1위 법인이다. 민간기업과 직접 비교는 무리겠지만 당시 일본의 3대 재벌이었던 [[미쓰비시그룹]], [[미쓰이 그룹]], [[스미토모]] 못지않게 당시 일본제국의 경제에 미치는 영향력이 컸던 회사다. 1917년부터 1925년까지 [[조선총독부]]에서 한반도 내 철도를 위탁경영하기도 하였고[* 지금 우리가 보는 구 [[서울역#s-6|서울역]]의 역사가 만들어진 시기도 요 시기.], [[동양척식주식회사]]와 동업으로 만주이민계획을 추진하기도 하였다. [[다나카 상주문]]에서도 중요한 역할로 언급되고 있다. [[제2차 세계 대전]]으로 일제가 패망하자 자연스럽게 해체되었고, 만주를 점령한 [[소련]]이 남만주철도를 모두 차지한 뒤 중국이 공산화된 후 스탈린이 축하 선물로 [[1952년]] 반환했다. 한편 1910년 [[경술국치]]가 기정사실화된 배경에는 만주철도의 중립화를 둘러싼 미일러 간의 암투가 촉매 역할을 했다는 [[http://epoque.egloos.com/4068112|주장]]이 있다. 러일전쟁이 끝나고 미국이 만주철도에 개입하려는걸 눈치 챈 일본이 바로 전쟁을 끝낸 러시아와 협상하고 미국에 앞서서 만주철도 관련 이권을 선수친 것. 그런 관계로 만주-중국으로 향하는 이권의 교두보를 위해서 한일강제병합을 공고화했다는 것이 이 글의 요지이다. 만철에 근무하는 일본인들의 경제적 보상 역시 좋은 편이었다. 만철에 근무하는 일본인들은 2만 명이 넘었는데, 이들은 중국인 하인을 고용하는 등 귀족과 같은 삶을 만주에서 누릴 수 있었다. 1960년대까지도 [[대한민국 철도청]]에서 만철이 생산한 [[화차(철도)]]와 [[객차]]를 사용하였다고 하니 의외로 그 흔적은 끈질겼다. 심지어 중국 [[신장 위구르 자치구]]의 오지에선 1980년에도 만철제 화차가 현역으로 굴러다니고 있었다. 더 경악할 만한 사실은 [[북한]]에서는 만철에서 쓰던 [[푸러형 증기기관차]][* 조선총독부 철도국의 푸레나 형(해방이후 푸러 7형)과 동일기종이다. 다만 이 기종은 일본본토의 철도차량 제조사와 경성공장에서만 생산되었기 때문에 만철제는 아니다.]가 [[북한의 철도 환경|'''21세기까지 운용되고 있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