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난흠 (문단 편집) == 생애 == 난흠은 양나라의 운휘장군이자 기주 자사인 난자운의 아들로 태어났다. 난자운은 어린 시절에 결단이 빨랐고 몸놀림도 남들보다 뛰어났다. 난흠은 아버지를 따라 북벌에 참가하여 동궁직합으로 임명되었다. 난흠은 527년부터 벌어진 양나라의 [[대통북벌|북벌]]에 참전하여 [[북위]]의 소성(蕭城)을 함락시키고 팽성의 별장 교중(郊仲)을 물리쳤으며, 의산성(擬山城)으로 진공하여 북위의 대도독 유속(劉屬)을 물리쳤다. 난흠은 다시 농성(籠城)으로 진군하여 말 1000여 필을 노획하였고 북위의 장수인 시집(柴集), 양성(襄城) 태수 고선(高宣), 범사념(范思念), 정승종(鄭承宗) 등을 격파하였다. 난흠은 다시 궐고(厥固), 장룡(張龍), 자성(子城)을 공격하였는데, 난흠이 이들을 공격하는 데 집중하는 사이 북위의 팽성 태수 양욱(楊昱)이 아들 양효옹을 보내 난흠을 공격하였으나, 난흠은 오히려 역공을 펼처서 양효옹을 격파하였다. 양욱이 다시 범사념과 조룡아(曹龍牙)를 파견하여 난흠의 공격을 방어하였으나, 난흠은 이들의 방어를 물리쳤다. 난흠은 이후 가절이 되어 계양(桂陽), 양산(陽山), 시흥(始興)에서 반란을 일으킨 만이들을 격파하고 안회현남(安懷縣男)으로 책봉되었다. 형주(衡州) 자사 원경화(元慶和)가 계양(桂陽) 사람인 엄용(嚴容)에게 포위를 당하여 사자를 보내 급보를 알리자, 난흠은 이를 구원하였고, 이외에도 많은 공적을 세워서 지절, 도독양남북진사4주제군사(督南梁南北秦沙四州諸軍事), 광열장군(光烈將軍), 평서교위(平西校尉), 양남진2주(梁南秦二州) 자사로 제수되었고, 작위가 후로 올라갔으며, 지무장군(智武將軍)으로 진호되었다. 난흠은 이윽고 지절·도독형계2주제군사(都督衡桂二州諸軍事)·형주(衡州) 자사로 전임되었는데, 북위에서 도독 동소(董紹)와 장헌(張獻)을 파견하여 남정을 포위하자, 난흠은 고교성에서 북위의 군대를 격파한다. 이로 인해 난흠은 산기상시가 더해지고 인위장군이 되었다. 난흠은 다시 형주(衡州) 자사로 부임하던 도중 광주에서 진문철(陳文徹) 형제를 격파하고 이들을 모두 사로잡았다. 형주에 이르러 난흠은 평남장군으로 진호되고 곡강현공이라는 작위를 받았다. 난흠은 형주에서 선정을 펼쳐서 형주의 관리와 백성들이 그를 흠모하여 난흠을 위한 송덕비를 세워달라고 주청하여 조정에서는 이를 허락한다. 난흠은 건강으로 돌아와서 산기상시, 좌위장군이 되었다가, 얼마 안 있어 산기상시, 안남장군, 광주 자사로 전임되었다. 하지만 광주에 이르러 난흠은 남안후 소염(蕭恬)에 의해 독살을 당하여 결국 사망한다. [[분류:양(남조)/인물]][[분류:몰년 미상]]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