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낙랑군 (문단 편집) === 낙랑군 관련 고분 자료 === 위의 유물들의 경우, 정식 발굴조사말고도 지표채집된 경우도 많다. 특히 '''봉니'''는 지표상에 노출된 경우가 있기 때문에, 낙랑군 평양소재설을 부정하는 일부 사람들에게는 "봉니=조작 가능"의 알고리즘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무덤, 특히 낙랑의 무덤은 지하식(반지하식)의 구조이기 때문에 이 무덤 자체를 조작하려 했다면 4세기에 무덤을 만들던 사람들처럼 인력을 잔뜩 모아 오래 작업해야 하니 틀키지 않으려야 않을 수가 없다. 특히나 낙랑 고분군에는 미디어에서 크게 다뤄지지 않는 저명성이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무덤들이 많다. 평양 일대에 소재하는 이 고분 자료와 그 출토품, 그리고 토성 유적 등으로 인해서 평양이 낙랑군과 관련이 있음은 분리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고고학]]적인 사고 없이 낙랑 재요동설을 주장하는 측에서는 조작설로 일관하고 있지만 사실 그 몇가지 태클들은 평양 소재의 기원전 1세기~기원후 4세기의 문화적 요소들이 중원계(漢式) 유물과 묘제임을 근본적으로 부정하지는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필사적으로 [[식민사관]], 미심쩍은 일제의 발굴 등으로 호도할 수밖에 없다. 참고로 북한 학계에서는 1960년대이전부터 낙랑군이 요령지역에 존재했다고 했지만 1990년대 이후부터 [[체고조넘]]의 교시를 무지성으로 따르는 연구로 변질되었다. 그 이전에 낙랑군 평양설을 펼쳤던 도유호의 연구는 당연히 축출되었고 북한학계는 사실상 공식적으로 재요령설로 입장을 정하였다. 근데 그래도 [[평양시|평양]]에는 낙랑의 유적과 유물이 밀집된 곳의 지명을 [[락랑구역]][* 한국의 구(區)에 해당]이라고 명명하여 행정구역을 개편한 바 있다. 여기서의 락랑은 바로 '''[[최씨낙랑국|낙랑국]]'''으로서 최근의 북한에서의 [[락랑구역]] 및 인근의 낙랑 유적을 발굴하면 "낙랑국 연구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자료"라고 서술한다.[* 북한 학계에서도 어디까지나 고분이 평양에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는다고 보면 된다.] 당대 중원을 비롯한 요서에서 유행하였던 목곽묘, 우리말 용어로는 귀틀묘[* 원삼국시대, 삼국시대 남한에서 확인되는 목곽묘와는 다른 것을 가리킨다. 남한지역에서 목곽묘라 함은 널무덤, 덧널무덤을 가리킨다.]라고 한다. 아래의 분포도를 보면 평양 일대에 얼마나 많은 중원계 목곽묘들이 조사되었는지 알 수 있다. [[일제강점기]]의 자료에 기반하였기에 또 호도될 수 있겠으나, 일제의 조사도면과 현재의 위성사진을 대조해보면, 적어도 북한학계 및 관련 기관에서 보존하기로 정한 낙랑 무덤들이 일제강점기 조사 당시 고분과 일치한다. [[파일:평양 낙랑고분 분포도.jpg|width=700]] ▲ [[평양시]] [[락랑구역]] 내 낙랑 고분 분포도 ------ * {{{+1 '''평양 정백동 1호(부조예군묘)'''}}} [[파일:부조예군묘.jpg|width=600]] ▲ 부조예군묘 출토 유물 부조예군의 인장이 발견된 낙랑의 추정 '''귀틀묘'''[* 토광 속에서 각재만이 밑바닥에 깔린 채로 확인되었기 때문에 귀틀묘(목곽묘)로 추정된다. 북한에서 발굴한 터라 보고서의 내용이 상세하지 않다.]로서 새로운 중원계 문화의 유입 이전, 즉 세형동검을 표지로 하는 재지계 유물이 다량 부장된 무덤이다. 무덤의 양식은 전형적인 중원계 귀틀무덤이지만, 부장된 유물은 세형동검문화를 대표하는 세형동검과 투겁이 출토된 것이며 이와 함께 전형적인 중원계 청동 유물 일괄이 공반된 무덤이다. 특히 위의 도면에서 쇠뇌의 손잡이 부분이 출토된 점을 통해서 한반도의 문화 요소와 다른 중원계임을 여실히 알 수 있다. 권총 모양의 청동기와 버섯 모양의 청동기는 마차 부속품으로서 역시나 중원계의 유물이다.[* 쇠뇌나 마차 모두 한반도 통사를 들어 잘 사용된 바가 없다.] 인장의 내용인 부조예군(夫租薉君)의 의미에 대해서 살펴보면, ‘부조’는 《[[한서]]》 <지리지>에 낙랑군의 현의 하나로 나오며, 《[[정사 삼국지]]》<위지> -동이전-에는 [[옥저]]로 나온다. 또한 종족명으로 쓰인 "{{{+1 '''薉'''}}}"의 용법을 살펴보면 《[[사기(역사책)|사기]]》에서는 ‘{{{+1 穢}}}’로 《[[한서]]》에서는 ‘{{{+1 穢}}}’와 ‘'''{{{+1 薉}}}'''’로 쓰이고, 《[[후한서]]》와 《[[정사 삼국지]]》에는 ‘{{{+1 濊}}}’로 쓰이고 있어 《[[한서]]》가 다루는 전한 시대의 표기법임을 알 수 있다. 이는 부조예군이 기원전 1세기에 존재했을 가능성을 보강해준다.[*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577632&cid=46619&categoryId=46619|네이버 지식백과 부조예군]] 참고] <염사치 설화>를 비롯해 출토된 인장의 내용 : 부조예군이라는 것을 아울러 고려해 봤을 때 이 묘주의 성격은 기존 [[예맥|예(濊)]] 또는 [[한(지역)|한(韓)]]계의 재지세력이 낙랑에 포섭되어진 경우라고 추정되고 있다. 낙랑군 설치 초기의 양상을 보여주는 주요한 자료로 평가받는다. 참고로 북한학계의 발굴에서 이러한 결과가 나왔음은 재요동설을 주장하는 재야의 무리에게 시사할 점이 많다. 첫 번째는 해방 이후 북한의 주도로 발굴한 결과임에도 중원계 유물이 나오긴 한다는 것이다. 다만, 북한학계는 이에 대해서 낙랑국의 중원 문물 수입품 또는 자체적 발전의 소산 두 가지로 나누어 해석한다는 것이다. 북한 학계의 학술적 모순은 일단 제쳐두더라도 북한 학계는 현시점에서 평양 및 일대의 낙랑국의 중국계 수입품[* 물론 주류 학계에서는 이것을 낙랑군의 유물로 본다.]을 발굴해내고 있다. 즉, 일제의 발굴 결과 해석은 타율성론에 연결되었을지언정 발굴조사 자체는 조작이 아니었음을 뜻한다. ------ * {{{+1 '''평양 정백동 2호(고상현묘)'''}}}[anchor(고상현묘)] [[파일:고상현묘, 정백동 2호.jpg|width=700]] ▲ 정백동 2호(고상현묘)의 유구 도면과 출토 유물[* 부조장인과 고상현인의 도면은 공개된 것이 없다.] 부조예군묘와 거의 성격이 동일한 무덤으로서 '''귀틀무덤'''을 채용하였고 재지계 유물과 중원계 유물이 함께 출토된 케이스다. 합장묘의 귀틀무덤으로써 단장귀틀묘보다는 후행하는 형식으로, 나중에는 부장칸이 점차 커지고 아에 전실(前室)이 생겨나는 구조로 변화했다. 부조예군묘와 마찬가지로 재지계의 표상인 세형동검에 외래계 유물류인 마면, 은제타출동물문대금구, 일산대와 고리형 장식 등이 공반되었다. 낙랑군이 첫 설치된 기원전 1세기를 전후한 무렵의 고분으로 추정된다. ------ * {{{+1 '''평양 석암리 9호'''}}} [[국립중앙박물관|중앙박물관]]에 가면 볼 수 있는 석암리 9호 ------ * {{{+1 '''평양 남정리 116호(채협총)'''}}} [[파일:채협총 발굴과 도면.jpg|width=700]] ▲ 채협총의 발굴당시 모습과 도면 [[파일:채협총 출토유물.jpg|width=700]] ▲ 채협총 출토 유물 낙랑군이 쇠퇴하던 3세기 무렵 무덤으로 추정되는 귀틀묘로서 식물의 줄기를 엮은 만든 뒤 채색하여 장식한 바구니[채협(彩箧)]가 출토되어서 '채협총'이라고 불린다. 위의 [[#고상현묘|고상현묘(정백동 2호분)]]에서 부장칸이 넓어졌다가 아예 전실이 생겨난 형태의 귀틀무덤이다. 채협총이 만들어진 3세기는 중원, 특히 화북, 요서지역에서 귀틀무덤 유행이 거의 끝나고 전실묘가 널리 대형으로 축조되기 시작하는 시점이었다. 하지만 채협총은 위계상 낙랑군의 3세기 무덤들 가운데서도 매우 위계가 높음에도 불구하고 전실묘가 아닌 귀틀묘로 축조하여 비교적 전통을 고집하여 중원과 낙랑의 고분문화 전개상의 차이점을 보여주었다. 역사적으로도 스멀스멀 중국과의 실질적이고 물리적인 커넥션이 줄어가던 시점의 상황을 반영하는 것이 아니냐는 견해가 있다. 채협총에서는 세형동검문화와 관련된 유물은 출토되지 않았고, 채협을 비롯하여 신수문경, 이배(離杯), 각종 칠기와 목기들이 출토된 중원계 유물 일색의 무덤이다. 신수문경은 육뉴의 사이에 신수가 묘사된 동경(銅鏡)으로 후한 중기와 후기에 유행하는 형태이기 때문에 2세기 후엽에서 3세기 초 정도로 추정된다. 칠기나 채협 등의 유기질 유물이 많이 출토될 수 있었던 것은 채협총이 있던 곳 주변이 습지의 환경이었기 때문이며, 개토 당시 채협총은 물에 잠겨 있었다. ------ * {{{+1 '''신천 새날리 1호'''}}} [[파일:신천 새날리 전실분 업로드.jpg|width=700]] ▲ 신천 새날리 전실분의 출토유물과 명문전(銘文塼) 북한에서 2002년에 조사되었다. [[황해남도]] [[신천군]]에 소재하는 전실묘로서 평양에서부터의 거리는 먼 편이다. 전실분의 벽돌 중에서는 가평 4년, 즉 252년의 확정적 기년이 새겨진 벽돌이 확인되어 주목된 바 있다. 다실분 계열의 전실분이 유행의 흐름 속에서 점차 단실화되어가는 양상의 과정을 보여주는 주요한 자료이다. ------ * {{{+1 '''평양역 구내 고분(동리묘)'''}}}[anchor(동리묘)] [[파일:동리묘 주요 조사내용.jpg|width=700]] ▲ 동리묘(영화 9년명전 출토 고분)의 일제강점기 당시 조사내용 낙랑군이 313년 이후에 폐지되고 나서 축조되는 전실묘이다. 원 명칭은 [[평양역]] 구내 고분이며, 조사 당시에는 영화9년명전출토 고분이라고 불렀다. 다만 명문의 내용 때문에 동리의 무덤이라는 의미에서 동리묘라고도 부른다. 이 무덤이 낙랑의 무덤이라고 딱 잘라 말하는 것은 틀렸을 수 있으나 낙랑군 철폐 이후 평양의 상황과 고구려의 평양 일대 지배방식의 일면을 보여주는 자료로 중요하다. 고분 자체는 낙랑에서 이어져오는 전실묘이기 때문에 계승성이 당연히 인정되는 무덤이며, 벽돌 중에 영화 9년(353)이라는 명문이 있어서 중요하다. 또한 '요동한현도태수령 동리조'(遼東韓玄菟太守領 冬利造)라는 내용에서 [[요동]]·[[한(지역)|한]]·[[현도군|현도]]의 [[태수]]인 동리라는 인물의 무덤임을 확인한 케이스이다. 353년이면 낙랑이 퇴출된 이후인데, 전실묘의 축조 양상도 낙랑의 전성기 시절과는 다소 다르다. 바로 석개천장이라는 형태로 궁륭형 천정을 채용하지 않는 전실묘인데, 위에서도 살짝 설명한 재지계 요소의 혼합으로 추정된다. 특히나 전석혼축분이라고하는 돌과 벽돌이 함께 사용되는, 중원에서는 유래없는 무덤이 축조되고 있는 것과 궤를 같이 하는데 이를 통해서 재지적 요소의 존재, 낙랑 퇴거 이후의 잔존세력의 향방을 알려준다. 이미 훼손된 고분이었음에도 출토유물이 다소 있었고 그 중에서 고구려의 귀걸이가 확인되었다. 위의 도면에서 아래쪽에 있는 세환이식과 태환이식이 형태는 물론이고 제작기법 또한 고구려의 귀걸이로 중원계와는 다른 양상이다. 이처럼 낙랑의 철퇴는 분명하지만 고구려의 평양지역 일대에 펼친 느슨한 지배방식 등의 면모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무덤이다. [[안악 3호분]]의 묘주로 추정되는 동수와 관련되어 있는 무덤이기도 하다. ------ * {{{+1 '''봉산 장무이묘'''}}}[anchor(장무이묘)] [[파일:장무이묘정인성안.jpg|width=500]] ▲ 장무이묘의 도면과 복원안[* [[영남대학교]]의 정인성의 복원안, 궁륭형이 아닌 석개천정임이라고 추론하였다.] 출토된 명문전 장무이묘 또한 [[안악 3호분]]이나 [[덕흥리 벽화분]]의 묘주처럼 중국에서 귀화한 인물 또는 낙랑에 포섭되었던 재지계 인물의 무덤 정도로 추측하고 있다. 장무이묘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역시 명문전이 다수 확인되었는데, 그 내용 중에는 使郡帶方太守張撫夷(사군대방태수장무이), 大歲戊在漁陽張撫夷塼(대세무재어양장무이전), 大歲申漁陽張撫夷塼(대세신어양장무이전)이 이목을 끌었었다. 여기서 대세무, 대세신은 태세 연간의 무신년인 288년이라는 견해와 태세법을 따르는 방식이 3세기에서 4세기까지 나타난다는 점에서 이 무덤이 대체로 3~4세기임은 틀림없지만 크게 3세기 중후엽(288년)이라는 견해와 353년을 기점으로 한 4세기 중엽이라는 견해로 나뉘었다. 하지만 묘실 자체의 고고학적인 경향으로 볼 때, 장무이묘의 천정 형태는 궁륭형(아치형)이 아닌 석개천정일 가능성이 제기되었으며 357년의 기년명을 갖는 고구려의 전실적석총인 [[우산하 3319호|우산하 3319호분]]의 구조와 유사함을 들어 4세기 중엽이라는 견해가 우세해졌다. 이뿐만 아니라 전(벽돌, 塼) 자체의 소성 방식에 대한 분석도 덧붙여 소성을 한 곳이 아닌 여러 곳에서 제작한 것으로, 낙랑 치하의 전(塼)에 비해서는 허접함을 꼬집으면서 낙랑의 직접적인 영향에서 벗어난 이후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하였다. 한편 무이(撫夷)라는 이름 또한 [[안악 3호분]]의 호무이교위(護撫夷校尉)라는 표현에서 이름이 아닐 가능성도 제기된 바 있다. 이는 장무이묘만 국한하여 나타나는 문제는 아니고 그 밖의 [[#동리묘|동리묘(평양 역전 구내 고분)]]나 [[덕흥리 벽화분]]에서 보이는 지나친 직책들의 존재 등에서 비롯되어 일종의 허봉(虛封)이라고 여긴다. 다만 이 허봉의 주체는 자칭일 가능성도 있겠지만 고구려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고 대부분의 낙랑 잔존 세력의 무덤이 고구려와 섞이는 양상 속에서 보면 허봉의 주체는 고구려일 가능성이 높다. 한편 [[이덕일]]도 이를 지적하며 조작설을 제기하였는데[[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81&aid=0002913469|#]], 위에서 말했듯이 정치수단으로서 허봉은 이미 중국이나 한반도 제 국가에서도 어느 정도 유행하였음을 감안하면, 이 지적에서 조작으로 넘어가기에는 수박의 겉만 핥는 비판이다. 결론적으로 장무이묘의 존재는 3세기 후엽에서 4세기 중반의 간략화되어가던 낙랑 전실묘의 변화과정을 보여주는 무덤이며, 석개천정이라는 중국에서는 잘 나타나지 않는 형태의 전실묘의 등장과 그 존재로 인해 낙랑의 퇴락과 고구려의 점령 과정을 보여주는 주요한 자료로 평가받는다. ------ * {{{+1 '''안악 로암리 고분'''}}} [[석호(후조)|건무 8년]] 기년명이 나온 전실분으로 로암리 벽화분과는 다른 무덤이다. 건무(建武)는 후한 [[광무제]]와 동진 [[원제(동진)|원제]], 후조 [[석호(후조)|태조]]의 재위 기간에 사용된 연호인데, 8년 이상 사용된 연호는 광무제와 후조 석호의 재위기간 뿐으로 건무 8년은 32년과 342년으로 볼 수 있다. 로암리 고분과 동일한 형태의 무덤이 평양역 구내 전실묘(355년 기년)와 동일하여 발굴자는 이를 토대로 후조의 석호 재위 기간의 연호를 채용한 것으로 보았다. 또 서읍태수(西邑太守)라는 명문이 확인되었으나 서읍이라는 지명이 사서에서 확인되지 않기에 발굴자는 이를 [[안악군]] 일대가 고구려에 의해서 (313년 이후이므로) 고구려의 영향 아래에서 발생된 현상이라고도 추정하였다. 로암리 고분도 전석혼축 또는 석개천장 전축분의 구조를 채용한 무덤으로써 낙랑군 묘제의 퇴행기에 해당하는 무덤으로써 위의 장무이묘와 마찬가지로 낙랑군의 철폐 이후의 점진적인 퇴화과정을 설명해주는 고분자료로 평가받는다. 그 밖에도 정백동, 정백리[* 일제강점기에 조사되었을 때는 정백리였으며 북한에 의해서 조사되었을 때는 정백동으로 지명이 바꿔서 정백동과 정백리를 구분하여서 부른다. 한국에서는 보통 일제강점기에 조사된 지명일지라도 몇 경우를 제외하고는 현재의 지명으로 바꿔부르는데, 조사의 주체가 한국이 아니다보니 이렇게 잠정적으로 구분하여 부르고 있다.]. 로암리, 남정리, 남사리, 토성동, 석암리, 정오동 등 평양 일대에서는 매우 넓고 많이 조사되어 보고된 낙랑 유적이 많다. 각 고분군의 고분 번호 수는 많게는 200번때까지 편호된 고분군이 있으며 보통 20~100기 정도가 확인되고 조사되었다. 만약 위의 유적 유물을 낙랑국이라고 한다면 왜 낙랑국이여야만 하는 것인지에 대한 [[고고학]]적 근거를 제시한 연구는 없다. 나아가 문헌사적으로도 낙랑국과 낙랑군이 어떤 차이점을 갖는지조차도 모호한 실정에서 위 유적들의 주체를 논단하는 것은 단순히 낙랑이 한반도에 있다는 사실 자체를 부정하고자 하는 저의를 깔고가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 뿐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