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낙랑군 (문단 편집) === 멸망 이후 === 고구려의 정복 직전에 탈출한 낙랑인 세력 1천여 가는 [[모용선비]]부의 대인 [[모용외]]에게 투항했다. 이 모용씨의 전연 치하에서 낙랑군의 일부 유민들은 요서 지역으로 건너가 낙랑군의 복원을 시도했지만 결국 흐지부지되었다. 4세기부터는 고구려나 백제의 책봉호에 낙랑 관련 관직이 나타나니 포기하는 면도 있었던 것 같고... 그러나 남북조 [[북제]] 시대에 폐지될 때까지 요서 지역에 군현의 형식은 남아 있었고, [[수나라]] [[양제]]의 원정 때도 이름은 남아 있었다.[* 이상의 내용은 이글루스 블로거 [[http://xakyntos.egloos.com/tag/%EB%82%99%EB%9E%91%EA%B5%B0/page/1|'야스페르츠'의 글]]을 참조하였다.] 한편 고구려가 정복한 옛 낙랑군 땅에 남아있었던 낙랑 유민도 많았고, 물론 낙랑군이 군사적으로 무너졌다고 해서 문화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이 땅을 차지한 고구려도 낙랑 사람들의 중국식이 섞인 문화를 강제로 버리게 하지 않고 천천히 유화적으로 대해서 동화시키려 했다. 2~3세기부터 등장한 낙랑의 벽돌 무덤은 4세기까지 꾸준히 나타났고, 고구려도 이 지역에 중국 계통의 [[유주자사 진]]이나 [[동수]] 등을 파견하여 반발을 최소화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는 한편으로 굴식 돌방무덤으로 대표되는 고구려 문화의 침투를 동반한 것이었고, 제19대 [[광개토대왕]] 대 남부 7개 성의 건립이나 평양 지역 9개 사찰의 건립 등 정지 작업을 기반으로 제20대 [[장수왕]] 때는 이 지역이 '고구려의 새 수도 평양'으로 자리하게 된다. 참고로 서구 학계 일각에서는 이 313년을 한국사의 시작, 즉 구체적 국가가 등장한 시점이라 보기도 한다. 이 '국가'라는 용어 때문에 그 앞은 한국에 역사가 없었냐는 식의 오해의 소지가 있을 수 있지만 학계에서의 국가라는 개념은 굉장히 복잡하고 정의하기 어려운 개념이다. 학계에서 다루는 국가의 개념은 사실 아직도 완벽한 정의가 되지 않았다. '국가'와 대비해 '국(國)', [[소국]], [[성읍국가]] 등 다른 용어를 써서 분류하려 하는데 이런 용어 사용조차 학자마다 다르다. 따라서 서구 학계에서 말했다는 한국사의 구체적 국가라는 표현은 낙랑군 이전의 고조선이나 부여, 초기 고구려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