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나혜석 (문단 편집) === 말년 === 말년의 그녀는 대인기피증과 우울증에 시달렸으며 나이가 들자 파킨슨병과 중풍이 들었지만 그럼에도 계속해서 여성운동을 위한 강연을 계속하였고 추후 사회와 멀어지기 위해 절에 귀양까지 해보려 했지만 같은 여성운동가 [[김일엽]]에게 자격이 못됨을 지적받고 포기했다.[* 김일엽이 일본에 두고온 아들 송영업의 방문을 매정히 뿌리치는걸 본 나혜석이 자신이 자식들을 향한 마음을 버리지 못했음을 알고 포기했다고 한다.] 끝내 몸과 마음 모두가 쇠약해져 요양원에 신세를 지게 된다. 자식들을 악마라 칭하며 폄하하던 그녀는 말년에 들어서야 자식들을 그리워해 화가로 명성이 높았던 파리로 떠나지 않고 국내에 남았다고 한다. 시집살이와 현모양처를 비판했던 그녀는 말년에 시어머니의 사망소식에 애정에 시댁을 찾아갔다가 쫓겨나기도 하고, 자식은 악마라며 폄하했다가 죽기 전애는 자식들을 만나보고싶어해 여러 번 만남을 시도했지만 김우영은 이러한 나혜석의 자식상봉을 막기위해 경찰을 동원하였으며 모든 아들딸들은 어머니의 방문을 거부하였다. 김우영이 경찰까지 동원해 자식 상봉을 막은 것과 자식들도 만남을 거부했던 것은 여담 항목에 후술한 [[아동 학대]] 논란이 주원인인 것으로 점쳐진다. 그녀는 죽는 순간까지도 자식들을 보기 위해 요양원[* 훗날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꼬꼬무]]을 통해 밝혀진 바에 따르면, '61세 노인 심영덕'으로 입소한 탓에 그 누구도 그녀가 나혜석임을 알아보지 못했으며, 그 후 '나고근'으로 이름을 고쳐서 생활했다고 한다.]에서 탈출까지 저질렀으나 결국 길에서 쓰러진 채 발견되었으며, 1948년 12월 10일 저녁 8시 30분 서울시립자제원 무연고자 병동서 [[영양실조]]로 사망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