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나혜석 (문단 편집) === 어린 시절 === 나혜석은 나 참판댁 또는 나 부잣집이라고 불리는 [[경기도]] [[수원시|수원]]의 명문가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나기정(羅基貞)과 어머니 최시의(崔是議) 사이의 2남 3녀 중 넷째(차녀)였다. 동복 형제들 외에 나계석이라는 이복언니도 있었는데, 나기정이 [[첩]]과의 사이에서 낳은 [[서녀]]였다. 나계석은 나혜석이 태어날 무렵, 13살의 어린 나이에 [[조혼]]을 했다.[* 나계석의 남편은 당시 수원부 유지였던 경주 최씨 기환.] 아버지였던 나기정은 보수적인 사대부 집안의 사람이었으나 성별을 가리지 않고 자녀들에게 신교육을 받게 하는,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일을 일으켰다.[* 서녀인 나계석에게는 신교육을 시키지 않았다.] 그 덕에 나혜석은 당시 여성들 중에선 특출난 편이였고 고등학교까지 나와 미술을 익혔다. 특히 둘째 오빠였던 나경석은 나혜석을 특히나 챙기고 아꼈는데, 이후 그녀에게 힘든 일이 닥칠 때마다 곁에서 많이 도와주는 행보를 보여주었다. 여기까지만 보면 부유하고 명망높은 집안, 꽤나 진보적이고 좋은 가족들 사이서 행복한 유년 시절을 보냈을것 같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았다. 고위 관료였던 아버지 나기정은 상당히 진보적인 엘리트처럼 보였지만, 시대적인 흐름을 크게 벗어나지는 않았다. 딸들에게 처음부터 정식 이름 대신 아명을 썼고, 나혜석은 '나아기(=나 참판댁 아기씨)', 그녀의 여동생은 '나간난(=나 참판댁 갓난애기)' 등으로 불렸다. 이런 과거적인 아명 붙이기는 나혜석이 [[진명여학교]]에 입학한 후에야 정식으로 ‘나명순'이라는 이름을 받음으로서 끝났다. 때문인지 나혜석은 이름에 대해 큰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였다.[* 후술할 결혼 뒤 임신 과정에서 제일 먼저 했던 것이 아이의 이름을 짓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아무리 집안이 어느정도 진보적이라 해도 사회적으로 보수적이였기에 (사대부+여성)이라는 입장은 언제나 눌려사는 삶이었다. 이보다 더 문제였던 것은 아버지 나기정은 본처인 최시의 이외에 여러 여성들을 [[첩]]으로 두었다는 것이다. 그중에는 나혜석보다 불과 1살 연상인 어린 첩까지 두기도 했었는데, 그녀가 첩인데다 기생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나기정의 총애를 받는다는 걸 방패삼아 자신의 이점으로 이용하여 본처인 최시의에게 온갖 갑질을 해댔다. 이는 절대 용납되는 일이 아니며 본래라면 [[칠거지악]]의 4, 6번에 따라 쫓겨나야 할 상황이건만 최시의는 남편에겐 하소연도 하지 않고 묵묵히 참으며 고생을 했다. 당시 양반사회에서 첩을 여럿 두는 것쯤은 별 문제가 아니었으나, 자신의 어머니가 직접 이러한 사회적 피해를 입자 이런 어머니를 가까이서 보며 자랐던 나혜석은 당시의 남성중심 가부장적인 사회구조에 반감을 가졌다. 나혜석은 고통받는 어머니의 삶과 (아마도 1910년대에) 주변의 또래 친구들이 [[조혼|어린 나이에]] [[강제결혼|강제적으로 시집보내져]][* 이런 일을 막기 위해, [[이화학당]] 등 여러 근대 여학교에서 [[금혼]] 학칙을 제정했다.] 이런저런 마음고생을 하는 것을 보고, 자신은 [[비혼|절대 결혼하지 않으리라고]] 다짐했다고도 한다. 이때부터 여성운동가로서의 사상이 자리잡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후 삼일여학교, [[진명여학교]], 일본유학을 거치며 학문과 식견을 넓혀가던 나혜석은 남성중심의 사회구조를 향한 비판을 담은 글들을 여러 잡지에 투고하기 시작했다. 이게 워낙 파격적이다 보니 본국에서 욕을 많이 먹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