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나하시 (문단 편집) === [[류큐 왕국]] === || [[파일:external/1e7f72fc7138c5ceff6ac4c8c5aa073e1b250b41d55823246aab787d78b6c099.jpg]] || || , [[교토대학]] 총합박물관 소장 || 나하는 원래 코쿠바 천과 아사토 천 하구의 만에 산재한 섬들이었다. [[삼산시대]]인 1406년, 사시키[* 佐敷, 지금의 [[난죠]] 시에 위치]의 [[아지]](按司)[* [[구스쿠]](城)을 다스리던 오키나와의 호족]였던 쇼하시가 중산(中山)의 수도였던 [[우라소에]]를 공격, 당시 중산왕 부네이(武寧)를 물리치고 자신의 아버지 쇼시쇼를 중산왕에 옹립했다. 이 때 중산의 수도를 우라소에에서 슈리로 옮겼으며 [[슈리 성]]을 류큐의 궁궐로 삼았다. 동시에 지금의 나하 일대가 정비되어 작은 항구가 되었다. 1451년에 쇼킨푸쿠왕이 [[명나라]]로부터의 책봉사를 맞이하려고 명나라의 기술자 회기(懐機)에게 명해 쵸코테이(長虹堤)라는 길이 1km에 이르는 둑길을 건설시켜 오키나와 본섬의 아사토 천 쪽과 연결시켰다. 육로 교통이 정비됨으로써 항구로서의 발전이 시작되어 나하 4정(那覇四町)[* 니시(西村), 히가시(東村), 와카사마치(若狭町), 이즈미자키(泉崎)]로 불리는 시가지가 형성됐다. 한편 1392년 중국 [[푸젠성]]에서 이주해온 사람들은 나하의 쿠메 촌(久米村)에 정착하고 있었다. 이들은 쿠메삼십육성(久米三十六姓)[* 여기서 삼십육성은 서른 여섯 가문이 아니라 그냥 많은 가문들이라는 뜻이다.]이라 불렸으며 진공사, 통역, 선박 제조 등 류큐의 무역과 외교를 지탱하는 일에 종사해 왔다. [[쇼신 왕]](재위 1477-1526)은 중앙집권 정책으로 류큐 왕국 각지에 할거하고 있는 아지들을 슈리에 모여살게 했으며 슈리는 크게 확장되어 왕족, 귀족 그리고 관리들이 모여사는 류큐 왕국의 중심도시가 되었다. 이 때의 슈리를 가리켜 수이웨구니(首里親国, すいうぇーぐに)라고 불렀다. 한편 항구도시 나하는 중국, 일본 그리고 동남아시아를 잇는 중계무역으로 번영하였다. 16세기 [[왜구]] 등의 습격으로부터의 방어를 위해 나하항 인근 해상에 있는 섬에 성벽을 쌓고 둑길을 만들어 코쿠바 천 하구의 나하 항의 남북으로 방어용 포대 미에구스쿠(三重城)와 야라자모리구스쿠(屋良座森城)를 건설했다. 게다가 나하항의 맞은편 남쪽의 카키하나(垣花) 등에도 시가지와 항만이 건설되었다.(나하 항 남안은 제2차 대전 후 빈 터에 돼 미군의 나하 군항이 되었다.) 1609년 류큐가 [[사츠마]] 번에 종속당한 후, 류큐에서 사츠마측에 도자기 장인을 보내줄 것을 요청하였고, [[임진왜란]] 때 조선에서 포로로 잡혀온 장헌공(張献功)이 류큐에 정착하여 나하의 치바나(知花)와 슈리의 타카라구치 (宝口)에 가마에서 도자기가 구워졌다. 1670년에 이러한 가마들을 츠보야(壺屋)로 통합하여 츠보야 아치문(壺屋焼物)이라는 도자기를 생산했다. 한편 슈리의 토리호리(鳥堀), 사키아먀(崎山), 아카타(赤田) 세 동네가 [[아와모리]] 소주를 제조할 수 있는 허가를 왕부로부터 받았으며 이 세 곳을 슈리산카(首里三箇)라고 불렀다. 토사의 퇴적으로 인해 나하는 류큐 왕국 말기에는 육지와 이어지게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