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나즈란 (문단 편집) === 현대 : 이스마일파 봉기 === [[파일:나즈란 아랍 시타델.jpg|width=860]] 1943년 압둘아지즈 국왕이 건설한 아마라 궁전 (قصر الأمارة ) 사우디 국왕 압둘아지즈는 앞서 언급된 셰이크 자비르 아부 사크를 통해 나즈란의 다양성을 존중하기로 합의하였다. 압둘아지즈는 1942년 나즈란에 아마라 궁전을 세우는 등 애정을 보였고, 이는 후에 총독궁으로 활용되었다. 한편 천년 이상 공존하던 유대인들은 사우디 지배 후 탄압이 심해지자 1949년 10월, 국경을 넘어 [[아덴]]으로 피신하였다. 압둘아지즈는 이들의 반환을 요구했지만 예멘의 야흐야는 그들이 예멘계라며 거부하였다.[* 다시 해당 유대인들은 메직 카펫 작전으로 [[이스라엘]] 혹은 남인도의 [[코친]]으로 이민하였다.] 그후 20세기 후반 들어 나즈란은 신도시 개발지로 선정되어 기존 시가지 동쪽에 현대식 도시가 세워졌다. 따라서 1974년 5만 이하이던 인구는 1992년 9만, 2004년 25만을 거쳐 현재 50만이 넘는다. 하지만 이로써 타지의 순니 주민들이 유입되며 기존 이스마일파 주민들과의 갈등이 빚어지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1996년 총독으로 부임한 미샤알 빈 수우드는 토착인의 주류인 [[이스마일파]]를 공직 임명과 재판 등의 영역에서 차별하여 반발을 야기하였다. 이러한 불만은 2000년 초엽 종교 행사일에 이스마일파 모스크가 폐쇄되며 폭발하였다. 4월 23일 경찰이 이스마일파 성직자를 체포하며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다. 무장까지 갖춘 시위대는 미샤알 총독이 거처하던 홀리데이 인 (현 글로리아 인) 호텔에서 군경과 대치하였고, 몇시간의 요청에도 총독이 대면 협상을 거부하자 양측의 총격전이 이어졌다. 3명의 사망자가 발생한 후 시위대는 이스마일파 구역인 쿠샤이와에서 농성하였고, 사우디 군이 일대를 포위하였다. 다만 몇 시간이 지난 후 시위대가 해산하며 더이상의 사상자 없이 사태는 마무리되었다. 하지만 수십명의 시위 주모자들이 체포되어 고문당한 후 수감되었고, 21세기 들어서도 총독이 공개적으로 이스마일파를 모욕하고 와하비파를 비판한 이를 해고하는 등 부조리는 이어지고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