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나즈란 (문단 편집) ==== 나즈란 학살 (520년경) ==== >알 아크두드의 신도들이 살해되었으니, 장작 위의 불에, 그들은 앉아있었으며, 저들이 신도들에게 저지른 것에 대한 증인들이노라.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 다는 이유로 그들을 박해했노라. (쿠란 85장 4장 ~ 8장) 박해를 겪은 나즈란 주민들은 6세기 들어 다시 같은 종교인 악숨과 동맹을 맺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517년에 정변으로 집권한 유수프 야사르 (두 누와스)는 정통성 강화를 위해 성직자들과 결탁하였고, 나즈란을 포함한 여러 도시들에 시나고그 (유대 회당)를 세웠다. 518년 혹은 524년, 그는 기독교도들이 시나고그에 방화했다는 이유로 보복에 나서 나즈란을 포위하였다. 도시는 곧 항복했으나 두 누와스는 주민들에게 기독교를 버리고 유대교로 개종할 것을 요구하였고, 이에 응하지 않은 약 2천 (혹은 2만)을 카바트 나즈란 교회에 몰아넣은 후 불을 질러 성지 훼손과 학살을 동시에 자행하였다. 혹은 불타는 구덩이에 던졌다고도 한다. 이 사건은 쿠란에도 제84장 (알 부루즈)에 언급되었으며, 살해된 기독교도들을 순교자로 묘사하고 있다. 기독교 측에서도 동방과 서방을 가리지 않고 이를 추모하며, 주교 알 하리트 (성 아레타스)를 성인으로 모시고 있다. 학살의 원인은 단순한 종교 갈등 뿐만 아니라 [[동로마 제국]]과 [[사산 제국]]의 패권 경쟁 속에서, 후자의 편을 든 두 누와스가 동로마와 악숨에 우호적이던 기독교 세력을 공격한 것으로 해석된다. 한편 학살 후 두 누와스는 [[라흠 왕국]]과 사산 조에 사절을 파견해 자신과 같은 기독교도 숙청을 제안했는데, 같은 기독교도였던 라흠 국왕 알 문디르 3세가 당시 수도 알 히라에 와있던 동로마 사절에게 전말을 알려주어 동로마 전역에 나즈란의 참극이 알려지게 되었다. 또한 학살에서 살아남은 두스 두 탈라반 등의 주민들은 [[콘스탄티노폴리스]]로 향하여 동로마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1세]]에게 도움을 청하였다. 분노한 유스티니아누스는 동맹인 [[악숨 왕국]]의 엘라 아스베하 (칼렙)에게 예멘 침공을 지시하였다. 당시 우미야가 이끄는 다른 피난민들이 [[악숨]]에 당도한 터라 사건을 알고 있던 칼렙은 장군 아브라하 알 아쉬람에게 7천 군대를 주어 파견하였다. 525년 아브라하는 예멘을 침공해 두 누와스를 전사시킨 후 기독교도 왕공 숨야파를 힘야르 국왕으로 추대하였다. 다만 535년 예멘에 계속 주둔하던 아브라하가 반란을 일으켜 숨야파를 폐위시켜 감금하고 스스로 자립해버렸다. 이로써 힘야르 왕국은 멸망하였고, 아브라하는 악숨 본국의 원정을 격파하고 570년 사산 제국에게 축출될 때까지 예멘을 다스렸다. 그가 한때 카바의 순례객 유치를 시기하여 [[메카]] 원정에 나섰던 일화가 유명하다. 한편 아브라하에 의해 복구된 나즈란은 이후 카바에 버금가는 아라비아 반도의 순례지가 되었고, 아브라하는 사나와 함께 이곳에 큰 교회를 세웠다. 사산 제국의 정복 후에도 나즈란의 기독교 공동체는 별탈 없이 유지되었고, 기독교도와 유대인들이 공존하는 교역 도시로 남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