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나주시/역사 (문단 편집) === [[후삼국시대]] === 901년부터 [[후백제]] 영역이었으나, 903년([[태봉]] [[궁예]] 3년/후백제 [[견훤]] 12년/신라 [[효공왕]] 7년) 궁예는 [[왕건]]을 파견해 [[나주 공방전]]을 펼쳐 금성군을 후백제에게서 빼앗아 나주(羅州)라 개칭한다. 그 후 전주가 후백제의 도읍으로서 견훤의 세력권이었던 것처럼 나주는 왕건의 주요 거점이 된다. 하지만 후백제는 이 일대를 빼앗으려고 집요한 노력을 기울였고, 907년에는 나주 전체를 잠깐 석권하기도 했었으나 908년에는 도로 왕건에게 빼앗겼고, 도리어 역공당해 이 당시 오늘날 광주광역시 서쪽 절반까지 도리어 빼앗기고 말았다.[* 여담이지만 이때 빼앗긴 오늘날 광주광역시 서부는 929년까진 고려가 계속 강하게 고수하고 있었다. 견훤 입장에서는 892년 청년 시절의 본인이 거병했던 지역을 내준 격이니 얼마나 뒤통수가 따끔하고 자존심이 상했을지는 상상이 어렵지 않다.] 하지만 후백제 또한 그 이후에도 광주와 나주 일대를 집요하게 공략했고, 때문에 오늘날 나주시 남평읍 일대는 내내 후백제 영토였다. 상술한 바 있는 신라 정규 기병 군단 미다부리정은 경덕왕의 군제 개편 당시 명칭이 현웅(玄雄)정으로 개칭되었고 검은 깃발을 부대기로 썼는데, 이 현웅정의 주둔지인 나주시 남평읍 일대가 내내 후백제 판도였음은 특기할 사항이다.[* 거사물정이었던 청웅정과 함께, 견훤의 신라 정규군과의 강한 인연이 여기에서도 드러난다.] 이후 929년에 후백제가 나주 전역을 점령하게 되지만 935년에 고려가 다시 수복하게 되며, 훗날 견훤은 장남인 견신검을 주축으로 한 반란으로 인해 금산사에 유폐됐다가 나주를 통해 고려로 탈출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