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나이키 (문단 편집) == 역사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faceslaces.com/SWWWW.jpg|width=100%]]}}}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s3.amazonaws.com/Bowerman_with_Oregon_track_athlete_circa_1969__original.jpg|width=100%]]}}} || || '''창립자인 필 나이트(Phil Knight)와 빌 바우어만(Bill Bowerman)'''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i2.cdn.turner.com/150715115654-02-nike-super-169.jpg|width=100%]]}}} || || '''나이키의 전신인 블루 리본 스포츠'''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s3.amazonaws.com/White_red_Cortez3_original.jpg|width=100%]]}}} || || '''당시 [[오니츠카 타이거]] 신발'''--아무리 봐도 코르테즈-- || 1957년 미국 오리건 대학교에서 만난 운동선수 '''필 나이트(Phil Knight)'''와 코치 '''빌 바우어만(Bill Bowerman)'''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그들에게는 운동화라는 공통의 관심사를 가지고 있었고 대학을 졸업한 필 나이트는 스탠포드 경영대학원에 진학하고 빌 바우어만은 여전히 코치로 남아 있었지만 미국의 운동화 시장을 독점하고 있는 독일의 견제와 기록 향상을 위해 고성능 신발의 영향력을 각각 생각하고 있던 그들은 의기투합하여 1964년 블루 리본 스포츠 (Blue Ribbon Sports, BRS)를 설립하였다. [[아식스]]로부터 자신들을 무역회사로 소개하여 아식스의 신발 메이커 중 하나인 오니츠카 타이거 신발 200켤레를 들이면서 사업은 시작되었다. 변변한 상점 하나 없이 창고에 제품을 쌓아두고 트럭으로 대학 운동장을 돌아다니며 제품을 판매하면서 첫 해 8천 달러의 판매로 250달러의 수익밖에 올리지 못했지만 필드에서의 경험을 토대로 한 우수한 운동화의 지속적인 연구는 선수들의 성적에 영향을 주었고 1969년도에 30만달러로 매출이 증가하였다. 1971년 블루 리본 스포츠는 더 이상 [[오니츠카 타이거]]를 유통하지 않고 자사의 신발 생산 라인을 구축하면서 '''나이키'''[* '나이키' 라는 이름은 [[그리스 로마 신화]] 에 등장하는 [[니케#그리스 신화의 여신|승리의 여신]]에서 따온 것이다.]로 이름을 바꾸게 된다. 이 때 나이키의 스우시 (Swoosh) 로고가 탄생하게 된다.[* [[오니츠카 타이거]]의 유전자를 고스란히 물려받은 신발이 바로 코르테즈이다. 자동차 업계로 본다면 아식스는 미쓰비시, 나이키는 현대자동차 쯤 되겠다.] 초창기에 자국 은행에 대출상담을 받으러 갔으나 거절당하고 한 담당자가 윗층에 일본 상사가 있으니 그곳에 가서 상담해 보라고 하였다. 그곳이 니쇼 이와이(현 소지츠)이다. 니쇼 이와이는 나이키에게 전폭적인 지원을 해주었다.[* 이후 나이키와 니쇼 이와이의 합작인 나이키재팬이 설립된다.] 또한 나이키가 당시에 생산거점을 일본에 두고 있었는데 그 위탁생산을 했던 곳이 바로 아사히 슈즈. 이후 나이키는 업계의 선두주자 [[아디다스]]를 추월하기 위한 노력을 시작한다. 필 나이트의 의지를 보여주는 일화로서, '''아무 생각 없이 회의에 아디다스 운동화를 신고 등장한 직원은 양말을 신고 회의에 참석할 수 밖에 없었다든가''', --사장 앞에서 경쟁사 신발을 신는 패기-- '''백설공주'''(아디다스)'''의 옷을 벗기는 난쟁이가 되겠다'''(...)는 필 나이트의 발언이 있다. 미국에 [[조깅]] 붐이 불었을 때, '''조깅은 스포츠가 아니다'''라는 이유로 신속하게 나서지 않던 [[아디다스]]와 달리 조깅화를 출시하여 미국 내 고객들의 호응을 얻었으며, [[마이클 조던]]을 내세운 캠페인은 마침 노쇠한 아디다스의 경영자 호르스트 다슬러의 병크[* 아디다스의 [[미국]] 내 총판을 맡고 있던 미국인들로부터 판매권을 인수하는데 자금을 무리하게 동원하였다.]와 겹쳐 [[아디다스]]의 [[리즈시절]]에 마침표를 찍고 만다. 미국 내에 피트니스 열풍이 불었던 당시, 나이키는 조깅 열풍 당시의 아디다스처럼 '''아줌마들이 음악 틀어놓고 춤추는게 피트니스지 스포츠가 아님'''하면서 늑장대응(...)하여 가벼운 피트니스화[* 아시아의 모 국가에서 실수로 장갑용의 가죽으로 신발을 생산하여 납품한 것이었다. 참고로 그 모 국가는 [[한국]]일 가능성이 높다. 화승산업에서 리복의 운동화를 생산했었기 때문이다.(...) 참고로 그 시절 세계 최대의 스포츠화 생산기지는 한국이였다. 산업발전시절 가발과 신발은 전세계 공급의 60% 정도를 차지했다고 한다.. 전세계인들이 쓴 신발이나 가발의 절반은 한국에서 제작된 제품이었던것 물론 그 단가를 맞추려고 엄청난 노동착취가 있긴했다.][* 화승은 1970~1980년대 나이키에 스포츠화를 공급했고 국내에도 나이키 브랜드를 들여왔지만 1986년 나이키와의 계약 종료로 [[르까프]] 브랜드를 런칭했다. 여기에는 나이키 뿐만 아니라 [[리복]]을 위시한 타 브랜드에도 신발을 납품하려는 화승의 계획과 자사에만 독점 납품하기를 원했던 나이키와의 의견 대립이 원인이였다는 설이 있다.]를 출시한 [[리복]]의 도전을 받는 듯 했으나... 그래도 미국이 홈 그라운드인지라 아디다스처럼 쉽게 자리를 내어주지는 않았다. 이후 [[1976년]] 브랜드 광고를 하게 되고 순식간에 성장하여 [[1980년]]에는 기업공개를 단행하고 뉴욕증권거래소에 상장함과 동시에 '''미국 운동화 시장의 절반'''을 집어삼키게 된다. 이때 쯤부터 [[아디다스]]는 전세계 시장 지분에서 나이키에게 완전히 밀렸다고 볼 수 있다. 나이키의 매출은 [[마이클 조던]]과 협업으로 제작한 [[에어 조던]] 시리즈의 성공으로 급상승하게 되었다. 참고로 [[에어 조던]] 시리즈는 농구 황제 마이클 조던의 스토리텔링으로 더해져 하나의 문화로 자리잡게 되었는데, 실제 나이키는 '''조던 브랜드'''를 독자적으로 런칭하여 운영 중이다. 그리고 에어 조던의 성공으로 큰 매출을 올린 나이키는 이후에도 [[타이거 우즈]], [[로저 페더러]], [[호나우두]],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코비 브라이언트]], [[르브론 제임스]] 등 각 분야의 스타들과 계약을 맺어 하나의 라인을 런칭하고 스토리텔링을 불어넣는 마케팅 방법을 고수하게 된다. 나이키는 많은 회사들을 인수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1988년]] [[콜한]]을 인수한 것을 시작으로 [[1994년]] 바우어 하키(나이키 바우어)를 인수하고 [[2002년]]에는 [[헐리]]를 인수했다. [[2004년]]에는 스타터, [[2008년]]엔 [[엄브로]]를 인수했다. 하지만 너무 여기저기 손대는 것 같은지(...) 자신들의 중심 사업에 다시 집중하기 위해 스타터, 바우어 하키, 엄브로, 콜한 순으로 처분되고 현재는 [[컨버스]]와 [[헐리]]만 남아있다. 이 블루 리본 스포츠, BRS는 나이키에서 다시 디자인의 소재로 사용하려는 기미가 보인다. 새로운 BRS의 로고를 디자인 한다던지..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