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나운규 (문단 편집) == 기타 == [[파일:external/rikszine.korea.ac.kr/%EC%9B%901411-%EC%82%AC%EB%9E%91%EC%9D%84%EC%B0%BE%EC%95%84%EC%84%9C.jpg]] 사진에서 보면 알겠지만, 나운규를 언급할 때 빠지지 않는 것은 '''[[안광|강렬한 시선]]'''이다. 딱 봐도 [[포스]]가 느껴진다. 실제로 같은 영화사 소속의 선배 배우가 이 눈빛을 보고 "너는 악역이나 범죄자 같은 배역이 어울린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50px-Na_Woon-gyu.jpg]] 그런데 의외로 평상시 모습을 찍은 사진을 보면 윗사진처럼 강렬하지는 않은 편이다. (세상을 떠나기 불과 두 달 전인 1937년 6월에 찍은 사진.) [* 이건 연극식 화장법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던 흑백영화시대의 전형적인 눈화장이기도 하다. 눈이 퀭하면서도 커보이게 강조하는 형태의 화장법인데, 이게 모조리 검정색은 아니겠지만 흑백영화라는 특징으로 더 강하게 인상이 주어지는 것에 더해서, 원래 멀리 떨어져서 보는 연극과 달리 얼굴만 강조되기도 하는 영화라는 특성상 눈이 엄청나게 강조되는 효과가 있다.나운규는 원래 연극으로 시작해서 연극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나운규를 찍은 사진은 대부분 영화 스틸컷이어서 그대로 분장이 반영되어 있다. 아래 사진은 영화스틸컷이나 영화를 찍기 위해서 분장한 사진이 아니기 때문에 인상 자체가 다른 것.] <[[벙어리 삼룡(1929)|벙어리 삼룡]]>을 촬영할 때 굉장한 직업정신으로 주위 사람들을 감탄시킨 일화가 있다. 컴퓨터와 CG 기술이 없던 시대에는 배우들이 직접 다 표현해야 했는데, 최후반부의 화재 장면을 찍을 때 몸에 불이 붙는 모습을 만들기 위해 나운규는 솜옷을 두껍게 껴입고 '''등에 석유를 뿌리고는 자신에게 불을 붙였다.''' 그런데 의도와 달리 불이 잔잔하게 골고루 붙지 않고 화약 터지듯 한꺼번에 치솟아 버렸고, 촬영장에도 불길이 일어났지만 카메라가 돌아가는 중 그만둬 버리면 다 허사가 되기 때문에 나운규는 그대로 연기를 시작했다. 함께 촬영에 임하던 여자 배우도 위험한 상황이었지만 나운규는 끝내 필요한 만큼이 다 찍히고 나서야 땅을 굴러 불을 껐고, 이때 입은 큰 화상을 치료받느라 한 달이 넘게 고생한다. 한편으로는 무절제한 여자관계로 인해 비난도 받았다. 가정이 있었지만 오향선이라는 [[기생]]과 동거하였으며, 심지어 기생과 [[뱃놀이]]를 하기 위해 촬영 장비들을 팔았다는 루머도 있을 정도였다. 오향선은 유신방이라는 이름으로 배우 활동을 하였다. 그러나 성격이 까칠한 편이어서 당대 영화인들 사이에서는 평가가 좋지 않았다. 이는 다음의 일화를 통해서도 그 일면을 볼 수 있다. 나운규는 결혼을 하고서도 윤마리아라는 여자와 사귀었지만 그녀에게 마음을 품고 있었던 친일파 '''[[허진종|허진종]](許振鍾)'''의 협박과 구타 등으로 자살을 시도했고, 결국 윤마리아와 헤어졌다. 나운규의 말기 작품들에 출연했던 배우 [[전택이]]가 남긴 증언에 의하면, 어떤 여성이 배우가 되고 싶어서 나운규가 묵는 여관까지 찾아 왔는데, 그러다가 어느새 나운규와 눈이 맞고 말았다고 한다. 이 사실을 알게 된 그 여성의 남편이 격분하여 여관에 쳐들어와 [[각목]]을 휘두르는 사태가 발생했는데, 마침 그 자리에 있었던 전택이가 [[일본도]]를 휘두르며 나운규를 보호한 덕분에 나운규가 간신히 봉변을 피할 수 있었다고. 이처럼 나윤규는 평가가 [[카멜레온]]처럼 다양한 인물이라 볼 수 있겠다. 어쩔 때는 천재적인 영화감독, 어쩔 때는 여자관계가 문란했던 사람, 어쩔 때는 조국을 위해 몸을 바쳤던 [[독립유공자|독립운동가]]. 그야말로 드라마틱한 삶을 살다갔다. 특이 사항으로는 연극에 입문할 때까지도 함경도 사투리를 썼다는 점이다. [[육진 방언]]이라고 하여 제주도 다음으로 심한 사투리를 사용하는 곳 출신이다. 게다가 고향 말에는 경상도에 비견되는 성조 억양이 있다. 이것 때문에 연기자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인식도 있었으나 치밀하고 끈질긴 노력으로 연기의 대가가 된다. [[http://world.kbs.co.kr/service/contents_view.htm?lang=k&menu_cate=history&id=&board_seq=59876&page=66&board_code=|#]] 나운규를 기리기 위해 한국영화감독협회 주관으로 1990년에 한국 영화/영화인을 대상으로 하는 '''[[춘사영화제|춘사영화상]]'''이 제정되었다. [[https://ko.wikipedia.org/wiki/춘사영화제|목록]] 특이한 점은, 그 해에 [[춘사영화제|춘사영화상]]을 받을 사람이 없다고 판단되면 시상하지 않는다는 것. 예를 들어, 2014년에는 감독상 수상자가 없었다. 나운규의 2남 1녀 중 차남 나봉한도 1960~70년대에 영화감독으로 활동했다. 그 중 하나가 [[속 꼬마신랑 제3편]]. 2016년 영화 <아리랑> 개봉 90주년을 맞아 나운규 사망 후 여배우들이 썼던 추모글이 최초로 공개되었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hm&sid1=103&oid=422&aid=0000217390|#]] 2021년 8월 홍범도 장군의 유해가 한국으로 돌아와 8월18일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되는 결정이 내려지면서 독립군 시절 자신이 상관으로 모셨던 홍범도와 한 공간에 있게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