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나운규 (문단 편집) == 생애 == [[함경북도]] [[회령시|회령군]] 회령읍 이동[[http://w3devlabs.net/korea/archives/19726|#]]에서 구한말의 군관을 지냈던 나형권(羅亨權, 1869년 1월 18일 ~ ?)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나형권은 구한말 부교(副校)로 있었다가 군대해산 이후 교원검정에 합격하여 1907년 7월 23일부터 그해 9월 17일까지 공립장진보통학교 부교원으로 재직, 9월 26일 공립회령보통학교 부교원에 임명되어 11월 28일 동교 본과 부훈도에 임명되었으며 1909년 12월 29일까지 근무했다.[[http://db.history.go.kr/search/searchResultList.do?sort=&dir=&limit=20&page=1&pre_page=1&setId=5&totalCount=5&kristalProtocol=&itemId=sjw&synonym=off&chinessChar=on&searchTermImages=%E7%BE%85%E4%BA%A8%E6%AC%8A&brokerPagingInfo=&searchKeywordType=BI&searchKeywordMethod=EQ&searchKeyword=%E7%BE%85%E4%BA%A8%E6%AC%8A&searchKeywordConjunction=AND|#]] 한편, 1914년 5월 28일 이전에 [[http://www.breaknews.com/499488|종두인허원]](種痘認許員:일종의 종두의사)으로 근무한 사실이 있으며 그해 9월 4일 의사면허 1499호로 회령군 부남면 이리에서 개업한 사실이 나타난다.[[http://db.history.go.kr/search/searchResultList.do?sort=&dir=&limit=20&page=1&pre_page=1&setId=2&totalCount=2&kristalProtocol=&itemId=gb&synonym=off&chinessChar=on&searchTermImages=%E7%BE%85%E4%BA%A8%E6%AC%8A&brokerPagingInfo=&searchKeywordType=BI&searchKeywordMethod=EQ&searchKeyword=%E7%BE%85%E4%BA%A8%E6%AC%8A&searchKeywordConjunction=AND|#]] 그밖에 1910년 2월 5일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15243|대한흥학회]]에 의연금 50전을 기부한 사실로 보아 당시 애국계몽운동에도 관심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http://db.history.go.kr/id/ma_011_0100_0210|#]] 1912년 회령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신흥학교 고등과를 거쳐 1917년에 조정옥과 결혼하고 1918년 만주 간도의 명동중학을 다니며 이듬해 3.1 운동에도 참가했으나, 일제의 탄압으로 폐교됨에 따라 1년여간 북간도 등 만주 지방을 떠돌아다녔다. [[1920년]]에는 독립운동 단체인 '대한국민회'(大韓國民會)에 가입하여 항일전을 전개하며 활동하거나 [[홍범도]]가 이끌던 [[독립군(한국)|독립군]]에 들어가서 독립투쟁에 투신했고, 같은 시기 '청회선 터널 폭파 미수사건'의 용의자로 붙잡혀 친구 [[윤봉춘]]과 함께 고문을 당한 끝에 2년형을 선고받고 1923년에 출소했다. 1년 6개월형을 선고받은 윤봉춘보다 형기가 6개월 길었는데, 3.1 운동 때 피신해서 옥살이를 하지 않은 것이 더해져서였다. [[1924년]]에는 부산에서 [[일본]] 자금으로 돌아가던 영화사 '조선키네마'에 들어가 윤백남 감독이 만든 <[[운영전]]>에서 가마꾼 역을 맡아 연기력을 인정받았고, 1925년 윤백남프로덕션의 첫 작품 <[[심청전/영화#심청전(1925)|심청전]]>에서 심 봉사 역을 맡아 처음으로 주연을 맡았다. 이듬해에 <농중조>에서 탁월한 연기력으로 관객들의 박수를 받아 큰 인기를 끌게 되었다. [[1926년]]에는 연기를 넘어 직접 메가폰을 잡아 영화 [[아리랑(영화)|아리랑]]을 제작하면서 스타급 감독으로 떠올랐고, 이 영화는 조선 영화의 황금기를 불러왔다. 그런데 영화평론가 [[조희문]]은 1997년에 낸 저서 <나운규>를 통해 "아리랑은 나운규가 만든 작품이 아니라 일본인 감독 스모리 슈이치가 연출한 작품이다"라고 주장했는데, 실제로 1926년 10월 1일자 <조선일보> 및 3일자 <매일신보> 광고에서 스모리 감독의 명의로 나왔기에 1980년대부터 연출자 논쟁이 벌어졌다가, 1990년대 초반에 나운규가 <아리랑>을 제작/연출했다고 언급한 <조선영화> 1936년 11월호가 발견되면서 일단락되는 듯하다가 조희문이 그 책을 내면서 또 의혹이 증폭됐다.([[https://www.chosun.com/site/data/html_dir/1997/06/30/1997063070380.html|조선일보 기사]]) 이러니저러니 해도 사실 이 영화는 애초부터 일제 강점기 시대에 제작된 반일 영화였기 때문에 심의를 통과시키기 위해 일본인 이름으로 심의를 넣어 무삭제로 통과시킨 것이었다. 심의를 넣기 직전에 일본계 통속극인 농중조를 직접 수정한 결과 엄청난 흥행을 이끌어낸 것도 일본계 경영진의 도움을 받을 때 도움이 됐다는 얘기가 있다. 결국 이것이 빌미가 되어 이후 제작한 작품들은 심의 통과가 어려워진데다, 심의 통과를 해도 가위질을 엄청나게 당하는 등 영화 제작을 하면서 끊임없이 고초를 겪어야만 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그는 1927년에 [[윤봉춘]] 등과 함께 나운규 프로덕션을 설립하고서 <옥녀>, <사랑을 찾아서>, <사나이> 등을 만들었고, 특히 1929년에는 [[나도향]] 작가의 소설 <[[벙어리 삼룡이]]>를 영화화한 <[[벙어리 삼룡(1929)|벙어리 삼룡]]>을 만들어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하지만 치솟는 인기와는 별개로 여전히 심의 통과 과정에서 어려움을 겪었고, 특히 <사랑을 찾아서>를 만들 당시 일본 경찰에게 검거될 뻔하기도 했다. 게다가 '사랑을 찾아서'의 원제는 '[[두만강]]을 건너서'였는데 독립운동가들이 항일운동을 계속하기 위해 들락날락하던 지역이라며 일본군에게 지적을 당했고, '저 강을 건너서'도 안 된다며 우겨대서 결국 '사랑을 찾아서'라는 쌩뚱맞은 제목이 된 것이다. 물론 항일적인 내용도 다 가위질당했다. 거기에 후술할 무절제한 사생활 때문에 회원들이 독자 영화사를 차려 독립해서 나운규 프로덕션은 채 2년을 넘기지 못하고 문을 닫았다. 이에 그는 박정현의 원방각사와 손잡아 <[[아리랑 후편]]>, <철인도> 등을 만들고, 일본 국수회 회원인 배우 도야마 미츠루(1893~1952, 제국주의 사상가 도야마 미츠루와는 동명이인. 본명은 오하라 미도리, 결혼 전 성은 시마다)가 세운 '도야마 미츠루 프로덕션'의 <금강한>에도 나왔으나 정서상의 문제로 실패하기 시작했다. 그는 생계를 위해 배구자 일행의 악극단 무대에 나오는가 하면, 1931년부터 1년여간 일본 도쿄의 영화계를 시찰하기도 했다. 1932년 귀국 후 그는 윤봉춘 등 옛 동료들을 모아 [[김옥균]]의 일대기를 다룬 <개화당이문>을 만들었으나 검열로 인해 흥행을 못했다.[* 1/7 정도를 잘라내고 나서야 겨우 상영할 수 있었는데 저만큼이 사라지니 당연히 이야기가 잘 연결되지 않아 어색했고 주제를 제대로 이해하기도 어려울 만큼 심하게 망가지고 말았다.] 같은 해에는 [[이규환#s-4]] 감독 작품 <[[임자 없는 나룻배]]>에서 주연으로 나와 호평을 받았다. 직전까지는 감독부터 각본, 주연까지 모조리 자기가 혼자 해서 (작업 자체는 수월할지언정) 다소 [[매너리즘]]적인 면이 있었으나, <[[임자 없는 나룻배]]>에서는 각본이 마음에 들어 삭발하고 주연만 맡았다는 얘기가 있다. 이후 <무화과> 등과 같이 사회/문명비판적 작품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 외에 <종로>, <칠번통의 소사건> 등을 만들거나 출연했으나 전부 실패했다. 같은 시기에는 극단 신무대와 형제좌를 위해서 연쇄극을 만들어 지방 순회공연을 다녔다. 1936년에는 <[[아리랑 제3편]]>을 당대 최첨단 기술이던 유성영화로 제작했고, 문예영화로 방향을 틀어 이태준 작가의 소설 <오몽녀>를 영화화해서 죽기 7개월 전인 1937년 1월 20일에 개봉했다. 특히 <오몽녀>는 대흥행하면서 영화 감독으로서의 자존심을 되찾을 수 있었다. 기존의 작품들은 제작, 시나리오, 감독, 주연 등을 혼자 다 했다면, 오몽녀는 오로지 감독으로만 참여하여 이목을 끌었다. 이후 <황무지>의 각본을 써 나갔으나, 안타깝게도 당시에는 [[난치병]]이던 [[결핵]]에 걸려 완성하지 못한 채 3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사망 후 홍제동 화장장에서 유해가 화장되어 한 암자에 안치되었다가, 해방 이후에는 망우리 공동묘지로 이장되었다. 1993년 같은 독립운동 동지이자 동료 영화인이었던 친구 윤봉춘과 함께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은 후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