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나선정벌 (문단 편집) == 기타 == * 2차 원정을 간 [[신유]]는 출정 때부터 귀국까지 쓴 일기인 [[북정일기]]를 남겼다. * 조선군은 자신들이 누구와 싸우는지 알지 못했다. 신유의 북정록 첫머리는 "북쪽 바닷가에 한 떼의 도적 무리가 있는데, 그 소굴은 어느 곳에 있는지 알 수 없으나 오로지 배로 집을 삼고 아무르강 상하를 오르내렸다."고 하였으며, 러시아 카자크를 오로소(吳老素)[* [[몽골어]]로 러시아가 오로스다.], 노추(虜酋) 등 '러시아'와 비슷한 발음으로 적고 있지만 "적들은 바다 쪽에서 강을 거슬러 온 것이 아니라 아무르강 상류에서 배를 타고 내려왔다. 그 나라가 아무르강 상류에 있는지 또는 육로로 나와 아무르강에서 배를 타고 내려왔는지 잘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아무르강의 상류는 몽골 지방에서 흘러나온다고 하니 그 나라는 강 상류에 있는 것 같지도 않다."고 하여 이들이 어디서 왔는지 끝내 알아내지 못했다.[* 단, 1차 정벌을 다녀온 변급이 나선은 서양에서 온 것 같다고 말하자 효종이 서양은 굉장히 멀리 떨어져 있는데 어떻게 나선이 서양인일 것이라고 생각하는지 물어보는 기록이 조선왕조실록에 있긴 하다.] * 2차 정벌 당시 조-청 연합군이 교전했던 상대가 [[스트렐치]]인지 [[카자크]][* 사실 카자크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카자크는 해전에도 강했다. 잠깐이나마 [[흑해]]의 제해권을 잡고 [[오스만 제국]]의 수도 [[코스탄티니예]] 교외 지역까지 쳐들어가 '''방화를 했던''' 적도 있을 정도이다.]인지 논란이 있다. [[영어 위키백과]]에는 사르후다가 스테파노프와 220명의 카자크를 죽였다는 내용이 있다. * 이때 러시아군은 조선군을 대두인이라고 불렀다. 다만 어디까지나 이들을 청군 내 정예병 정도로 생각한 것이지, 이들이 조선인이라는 것까지 알았던 것은 아니다. * 러시아군의 포수들은 대개 진형을 길게 펼쳐서 화망을 펼치는 [[전열보병]] 전술을 사용했는데, 조선군은 산악 경보병식 '''[[저격|직접 조준사격]]'''을 하였다고 한다. 조선군의 조총 운용에서 특별한 점이 있었는데, 납 탄환이 아닌 주조한 무쇠 탄환을 쓰기도 했다고 한다. 납은 무르기 때문에 장전할 때 꼬질대로 밀어 넣는데 문제가 없지만, 무쇠 탄환은 조금만 규격이 안 맞아도 나폴레옹 시절 [[샤프슈터]]들이 하듯 망치로 탄환을 때려 박아 넣어야 할 정도로 장전하기 힘들다. 그러나 그만큼 탄환이 총신에 꽉 물리고 납 탄환보다 더욱 단단한 소재로 만들어졌기에 명중률이나 위력이 높아지는 장점이 있다. 러시아군은 조선군의 저격술을 인상적으로 보았지만 한편으로 신유도 [[코르벳|러시아군의 함선]]이 [[판옥선]]만큼이나 견고하고 총포를 다루는 기술이 절묘하다는 표현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일제 발포하는 서양식 전열보병 전술에 강한 인상을 받은 모양이다.[* 흔히 생각하는 것과 달리 전열보병 전술이 전투력 면에서 개별 사격보다 훨씬 우월한 건 아니었다. 일단 유럽보다 전술 발전이 늦어 18세기까지 조준사격 전술을 고집했던 오스만도 17세기까지 유럽 국가들과 전쟁하면서도 전열보병 전술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유럽 국가들도 전열보병 외에 조준사격을 주로 하는 경보병들을 운용했는데, 경보병을 주력으로 사용하지 않은 건 지휘나 장전 속도 문제도 있지만, 무엇보다 경보병으로 쓸 수 있는 병사는 총기에 매우 숙련되어 있어야 전투력을 발휘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즉 전술적인 위력보다는 병사를 양성하는 과정이나 훈련 기간 측면에서 전열보병이 훨씬 우월했기 때문으로, 전열보병 전술을 쓰는 러시아군이 경보병 전술을 쓰는 조선군에게 밀린 것은 단기적인 전술적 차원에서의 결과이므로 의아하게 볼 것까진 아니다.] 그리고 러시아군이 선실로 숨거나 강가에 배를 대어 성벽처럼 이용해서 끝까지 맞서 싸웠다면 승패를 가리기 어려웠을 것이라 보았다. * 전투가 끝나고 신유는 수풀에 숨어있다가 투항한 러시아군 10여 명을 잡았다. 실제 통역을 통해 러시아 포로와 이야기해보기도 했다고. 한편으로 조선군은 이 러시아 포로들에게 쌀밥과 [[간장]]을 주었는데 난생 처음으로 한식을 접한 러시아 포로들은 적응을 하지 못하고 인상을 찡그리며 뱉어냈다. 이걸 보고 신유는 딱히 화내지 않고 "천하의 입맛이 다 같지는 않은가 보구나..."라면서 넘어갔다. 심지어 당시 상황을 조금만 더 생각해보면 알 수 있겠지만 이 러시아군 포로를 확보한 곳은 바로 나선 지역, 즉 조선의 국토가 아닌 지역이었다. 당연히 이들에게 제공한 건 제대로 생산한 간장도 아니라 조선군이 원정을 떠나면서 챙겨 온 [[전투식량]]용으로 만든 간장일 것이다. 거기에다 당대의 식품유통상황을 볼 때 참기름이나 다른 재료가 충분히 들어간 것도 아닌 만큼 러시아군 입장에서는 한국인들이 [[베지마이트]]나 [[마마이트]]를 처음 접했을 때의 느낌과 비슷했을 것이다. 거기다 전통식 조선간장은 꽤 역한 냄새가 나서 현대 한국인도 냄새를 맡으면 구역질을 할 것이다. 또한 [[러시아 요리]]와 [[한국 요리]]의 취향 차이도 크게 작용했을것이다. 러시아 요리 문서를 보면 알수있듯 러시아 요리는 단맛을 크게 중요시 했는데 [[설탕]] 문서에서 보듯 한국요리는 단맛을 좋아하긴 했지만 단맛을 요리에 내기 힘든 환경이었다. 실제로 아래 일화에서 나온 V.P 파르네프의 서술을 보면 조선요리를 평하는 일화에서 설탕을 하나도 넣지 않는 역겨운 조선차 같은 악평을 늘어놓다가 달달한 술(끓였다는 표현을 보면 [[모주]]로 추정된다.), 달달한 안주를 먹을때는 한숨을 쉬며 "언제 다시 이런 맛있는 음식을 먹을수 있을지 모르겠다."라고 극찬을 하며 극과 극의 반응을 보이는 대목이 있다. * 이때 러시아군은 수석총인 [[플린트락]] 머스킷을 사용했고 조선군은 [[화승총]]인 [[조총]]을 사용했는데 조선군 군관이었던 신유가 각고의 노력 끝에 수석총을 한 자루 구한 바가 있다고 한다. 흔히 알려진 것과 달리 일단 신유의 북정록에는 수석총을 입수한 날의 기록 이후로는 수석총에 대해서 별다른 기록이 없다. 거기다 유럽과 달리 조선은 전쟁이 빈번한 국가가 아니었으니 수석총에 투자할 가치도 크게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조선도 바보는 아닌지라 화승총을 꾸준히 개량했으며 적어도 [[강선]]이 상용되고 [[퍼커션 캡]]이 등장하던 산업혁명 이전까지는 총기 성능의 차이는 생각만큼 크지 않았다. 화승총이냐 수석총이냐는 결국 격발 방식이 화승에 붙어 있는 불을 갖다 대냐, 부싯돌을 갖다 대냐의 차이이지 다른 곳에는 차이가 거의 없었다. 다만 점화 방식에 기인한 운용상의 차이는 다소 있었는데 수석총은 화승총을 사용할 때에 비해 "불 관리"가 사라지고 장전 속도가 빨라졌으며 집단 운용에 있어 통제가 용이했던[* 모든 화승총들은 화승의 불꽃과 관련된 문제를 안고 있지만, 특히 한국과 일본에서 주로 쓰였던 순발식 화승총은 총을 발사하면 화승이 방아쇠에서 빠져나가 뒤로 튀는 문제도 추가적으로 가지고 있었다. 빠진 화승을 다시 꽂아 넣는 데 몇 초가 더 걸리는 것은 당연하며, 그 도중에 불이 꺼지기라도 한다면 다시 불을 붙여야 했다. 반면 플린트락은 부싯돌 불꽃을 즉각 일으켜 점화하는 방식이기 때문에 이런 현상이 없었다. 덕분에 사격 속도가 보다 균일했으며, 장교들 입장에서 전열 보병들의 일제 사격을 통제하기에도 용이했다.] 것은 좋았지만 동시에 불발률은 높아졌고, 명중률은 낮아졌다.[* 플린트락 방식으로 총을 점화하려면 부싯돌과 쇠판을 강하게 부딪혀 불꽃을 만들고, 이 충격으로 쇠판을 열어젖힌 후, 그 아래 드러난 화약접시에 불꽃을 처박아야 했다. 이를 위해 강한 스프링이 사용되었는데, 덕분에 방아쇠를 누를 때마다 스프링이 퉁기며 진동을 발생시켜 명중률이 낮아졌다. 또한 불꽃의 양과 튀는 방향, 충격으로 인한 격발 부품 고장, 부싯돌 마모, 습도 등의 다양한 문제들로 인해 불발이 되는 경우도 많았다. 순발식 화승총도 스프링을 쓰기에 유사한 문제가 있었지만, 애초에 화승의 불꽃을 화약접시에 직접 갖다 대기만 하면 되는 확실한 구조를 채택했기 때문에 플린트락만큼 강한 스프링을 쓸 필요가 없었다. 거기다 뺨에 총을 붙이곤 방아쇠를 잡은 오른팔은 뒤로 당기고, 총신을 잡은 왼손은 앞으로 뻗는 조선-일본 특유의 파지법 때문에 그 정도 진동은 충분히 제어 가능했던 모양.] 기계 부품과 부싯돌[* 일반적으론 [[흑요석]]이나 [[플린트]] 등의 패각상 깨짐이 나타나는 광물들이 쓰였다. 한편 [[프로이센군|프로이센 왕국군]]의 경우 이들 광물을 구하기 힘들어 대체품으로 [[마노]]를 사용했다. 깨지는 특성상 이들 부싯돌들은 여러 번 쓴 뒤에는 갈아줘야 하는 소모품들이었다. 예를 들어 영국 [[브라운 베스|브라운 베스 머스킷]]의 경우 대략 20발 쏘고 난 뒤에는 부싯돌을 교체해야 했다. 당연하지만 이런 질좋은 부싯돌은 가격도 비쌋기 때문에 병사들이 몰래 팔고 값싼 부싯돌로 바꿔끼우는 등 군기관련 문제가 많았다고 한다. 한국과 일본에는 이런 좋은 부싯돌 자원이 거의 없었기에 양국은 플린트락을 도입하는 데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의 추가로 인해 가격이 더 높아지는 것은 당연하고. 결국 유럽 국가들이 플린트락을 채용했던 이유는 플린트락이 딱히 성능이 더 우월해서라기보다는, 전열보병과 같은 집단 보병대를 사용하고 또 이를 상시 유지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러한 전술 운용에 좀 더 적합했던 플린트락을 큰 돈을 주고서라도 제식으로 채택했던 것. 그러나 이러한 기술격차는 점점 누적되어서 훗날 200년 뒤 러시아 제국과 국교를 맺어 러시아 군인들이 조선에 들어온 뒤에 조선으로 파병 온 V. P. 파르네프 대위는 회고록에서 두만강 근처 경흥 군수는 러시아군이 사용하던 레밍턴사의 3연발 소총을 구매하기 위해 거금을 제안하자 러시아군 장교들이 레밍턴 소총은 너무 옛날 총이라 조금만 기다리면 신형 미국제 [[베르단|버든 소총]]이 출시되니 그걸 사라고 조언하는 일화가 있다.[* 당시 미국과 러시아는 서로 우방국이라 미국제 무기를 다량으로 구매하기도 했다.] 또한 나주 관아 소속 포수들과 서로의 총기를 비교하며 사격시험을 하는데 러시아군은 미국제 [[베르단|버든 소총]] 같은 트랩 도어 방식의 소총으로 무장했지만 조선군은 여전히 조총 아니면 머스킷을 사용하고 있었다. 조선군들은 러시아군 소총의 연사 속도와 정확도를 부러워하며, 이런 소총으로 무장했으면 일본군을 몰아낼 수 있었을 거라고 한탄했다고 한다.[* 출처 '내가 본 조선 조선인' 中 V. P. 파르네프]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