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나선정벌 (문단 편집) === 샤르후다의 1차 토벌 === 조선의 조정에선 함경도 병마우후 신급을 지휘관으로 삼고, 조총병 100여 명을 선발하여 1654년(효종 5년) 3월 23일 [[두만강]]을 건너 청의 영토로 진입했다. 이후 8일간 걸어서 행군한 끝에 닝구타 인근에 주둔하던 샤르후다 지휘하의 청군과 합류했다. 이들은 [[송화강]]과 무단 강이 만나는 합류점인 삼성까지 가기 위해 무단강벌 흐름을 따라 배를 타고 가기 시작한다. 이렇게 결성된 조청연합군은 총 1천여 명 규모였다.[* 단, 청군은 이번에도 현지 원주민들을 동원했기 때문에 순수 청나라 정규군과 조선군만의 연합부대는 아니었다. 나선정벌의 무대가 되는 아무르강과 송화강 유역의 원주민들은 문명 발달 수준은 많이 뒤떨어졌지만 만주족처럼 기마민족인 경우가 많아 무장의 수준에 비하면 나쁘지 않은 전투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청나라가 제대로 된 군함을 동원할 역량이 없었기에 아무 배나 적당껏 징발해 이동했는데 대략 120척 정도였다. 공교롭게도 하바로프는 공로를 인정받고 모스크바로 돌아간지 오래였고, 나선 정벌군이 마주치게 된 러시아 원정대는 그의 후임 스테파노프가 이끌고 있었다. 당시 스테파노프가 거느린 군사는 400여 명 규모였다. 스테파노프의 함대는 아무르강에서 송화강으로 가고 있었는데, 마침 송화강 하구로 진입한 조청연합군과 마주친다. 이 때가 4월 28일이었다. 원래 샤르후다는 수상에서 러시아 원정대를 요격, 조선 포수들이 선두에서 저격을 행한 후 청군 및 원주민 군대가 승선하여 마무리 짓는 방향으로 작전을 계획하고 있었으나, 예상과 달리 스테파노프의 원정대는 [[캐러벨]]과 [[코르벳]] 같은 본격적인 군함을 타고 이동하고 있었고 청군히 징발한 배들은 [[자작나무]] 껍질로 대충 만든 땟목 수준의 배인 '자피선'[* 변급이 효종에게 보고한 내용에 따르면 자피선 중 작은 것은 너댓 명밖에 탈 수 없었고 큰 것도 17인승밖에 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마저도 대다수는 4~5인승짜리 작은 배였다고.]들이었다. 적의 전력이 이전보다도 훨씬 더 강화된 상태인 것을 본 샤르후다는 작전을 완전히 갈아엎었다. [[파일:external/military.china.com/r_15270143_200901061639329237700.jpg]] (이 전투를 묘사한 러시아 측의 보고서에는 강변의 청군을 보고 '전투배치 훈련을 잘 받은 군사들이었으며, 이들은 여러 종류의 깃발을 세운 채 각 깃발 아래 각각의 중대가 배치되어 있었다'고 되어 있다. 청군의 팔기 체계를 잘 파악해낸 티가 난다.) 샤르후다는 수상에서 러시아 원정대를 요격한다는 당초의 계획을 포기하고, 대신 러시아 원정대가 요새에 들어가 있지 않고 밖에 머무르고 있는 상태임을 노려 육상에서 급습하는 것으로 작전을 바꿨다. 단순히 러시아 원정대를 향해 냅다 들이박는게 아니라, 참호와 토벽 등의 야전 축성물을 설치하고 그 뒤편에서 러시아 원정대를 조선 포수들이 저격하여 지원하는 방안[* 여담으로 아까부터 조선 포수들이 청군과 떨어져 저격 임무만 맡는 이유는 청군과는 편제에 차이가 있어 따로 움직이는 것이 편리할 조선군의 수가 청군보다 작아서 최적의 효율을 내려고 한 이유도 있으나, 약 30% 대의 명중률을 보이는 청군 조총병보다 약 6~70%라는 압도적 명중률을 보이는 조선군 조총병들이 저격 임무를 감행하기에 좋았기 때문이다. 청군 또한 당시 이 사실을 알았기에 이런 작전을 준비한 것이다.--대한민국의 올림픽 사격, 양궁 실력이 이때부터 시작됐구만--]을 마련했으며, 이것이 나선정벌 승리의 핵심 원인이 되었다. 러시아 원정대가 반응하기 전에 제빨리 축성물을 쌓고 그대로 조선군과 청군, 원주민 부대 전원을 투입하면서 전투가 시작되었다. 전투는 청군이 러시아군의 주의를 끄는 동안 조선군이 강변에서 러시아군을 내려다보며 저격을 하여 러시아군의 피해를 누적시키는 식으로 진행되었다. 조선군은 수도 적었고 전원이 조총병이었기에 근접전에서 취약할 수도 있었으나, 샤르후다가 설치해둔 야전 축성물의 보호를 받을 수 있었고, 그걸 넘어오는 적은 청나라 기병들이 차단할 수 있었기에 별 문제는 없었다. 사전에 야전 축성물을 쌓은 것에서 샤르후다가 상당히 유능한 지휘관이었음을 알 수 있다. 러시아군은 전투 중 강변에서 사격하는 조선 포수들의 저격에 막대한 피해를 입었으며, 이에 대항해 맞사격을 가했으나 샤르후다가 미리 설치해둔 토벽 때문에 별 성과를 볼 수 없었다. 총을 쏘는 족족 토벽 뒤로 후퇴해버리는 조청 연합군을 공격할 마땅한 방법이 없었기에 러시아 측은 강변에 상륙 후 조선군에게 돌격을 시도했으나, 청나라 기병대에 차단 당해 막대한 피해만 입고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스테파노프 원정대는 아무르강 상류로 퇴각하기 시작하는데, 청군이 이를 추격한다. 청군의 선단은 4일 동안 쉬지 않고 러시아군을 추격했지만, 재수없게도 동풍이 불어 스테파노프 원정대는 돛을 올리고 빠르게 퇴각하여 아무르강 상류에 러시아 원정대가 세운 쿠마르스크 요새[* [[헤이룽장성]] 다싱안링 지구 후마현(呼玛县). 후마라는 이름 자체가 이 쿠마르스크라는 이름에서 기원한다. 이곳은 아무르강 강변에 있는데 강 건너는 러시아 영토이고, 강 건너에는 동일한 이름에서 기원한 '쿠마라'(Кумара)라는 이름의 마을이 있다.]에 들어가 버렸다. 샤르후다는 멍청하게 공성장비도 없이 요새에 들이박을 생각이 없었기에 병력을 물러 6월 13일 닝구타로 돌아갔으며, 나선 정벌군은 일단 해체되었고, 샤르후다도 다른 지역으로 배치되었다. 조선군은 조선을 떠난 지 84일만에 돌아오는데, 사상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