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나르세스 (문단 편집) === [[타기나이 전투]] === 나르세스는 라벤나에서 출정해 로마로 진군하던 중 리미니에서 농성하는 동고트족의 저항에 부딪쳤다. 하지만 538년에 리미니에서 적에게 포위된 경험이 있던 요한네스의 계책에 따라 비교적 쉽게 공략할 수 있었다. 이후 나르세스는 플리미니아 가도를 따라 남진하다가 552년 6월 말 타기나이 평원에서 토틸라와 마주쳤다. 이때 양측의 전력은 로마군 2만 8천 4백명, 동고트군 1만 3천명으로 2배 이상의 차이가 났다. [[토틸라]]는 앞서 구원을 요청해둔 프랑크군이 도착할 때까지 시간을 끌기 위해 나르세스에게 평화협상을 제의했다. 프로코피우스에 따르면, 나르세스가 토틸라에게 항복과 전투 중 하나를 택하라고 알리자 토틸라는 "8일 후에 맞붙자"고 제의했다고 한다. 그러나 나르세스는 적의 의도를 예측하여 평화 협상을 거부하고 전투를 감행했다. 나르세스는 병력의 우위에도 불구하고 서두르다 일을 그르칠 우려가 있다고 판단해 군대를 상당히 방어적으로 배치했다. 나르세스는 게르만족 용병대가 동고트족과 토틸라에게 동질감을 느껴 배신할 것을 우려해 같은 부족끼리 묶지 않고 다른 부족끼리 섞어서 중앙에 배치했다. 그리고 양 옆에 로마 기병대가 배치되었고 양익에는 궁병 4천명을 배치했다. 전투가 개시되기 전, 토틸라는 로마 진영의 배후를 급습하기 위해 로마 진영의 왼쪽에 위치한 언덕에 기병대를 파견했다. 하지만 나르세스는 미리 언덕에 장창병과 큰 방패를 갖춘 보병대를 배치해 기병대를 성공적으로 격퇴했다. 이후 토틸라는 시간을 어떻게든 끌기 위해 평화 협상을 다시 한 번 제의하고 결투를 벌이기도 하고 호위병 하나 대동하지 않고 화려한 갑옷을 입은 채 말을 몰아 온갖 묘기를 선보이는 등 갖은 노력을 기울였다. 마침내 테이아가 이끈 2천의 지원 병력이 7월 초에 도착하면서 동고트군은 1만 5천명으로 늘어났다. 이후 토틸라는 점심을 먹으러 전열을 이탈하는 듯하다가 적이 방심했을 거라고 판단하고 곧장 돌격했다. 그러나 나르세스는 병사들에게 각자 위치에서 휴식을 취하게 하는 한편 궁수들에게 계속 준비하고 있을 것을 지시해놓았고, 덕분에 궁수들은 적 기병대를 향해 가차없이 쏴 전열을 흐트러놨다. 그후 나르세스의 로마군은 압도적인 병력으로 밀어붙였고 나르세스가 측면에 배치해두었던 기병대를 진격시켜 동고트 군대를 포위했다. 이후 로마군은 포위당한 동고트족을 일방적으로 학살했다. 전세가 기울자, 토틸라는 다섯기의 호위대와 함께 피신하려 했다. 그러나 추격대가 간격을 점점 좁혀오자, 토틸라는 말머리를 돌려 돌진했고 로마 게피데 용병의 우두머리인 아스바두스의 창에 찔려 전사했다. 그의 주검은 근처의 카프라에 빌라에 매장되었다가 나르세스가 동고트족 여인의 증언에 따라 매장지를 확인 한 후 시신을 양지바른 곳에 다시 묻어주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