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나르세스 (문단 편집) === [[동고트 왕국|고트 전쟁]] === 538년경,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이탈리아에서 동고트족과 전쟁을 벌이고 있는 벨리사리우스를 돕기 위해 나르세스를 대장으로 하는 육군 7000명을 파견했다. 538년 4월 안코나 인근 항구인 피케움에 상륙했다. 벨리사리우스와 나르세스는 그곳에서 만나 군사 회의를 열어 리미니에서 동고트족에게 포위된 요하네스 구원 문제에 대해 논의했다. 벨리사리우스는 자신의 지시에 불복종하기 일쑤인 요한네스를 돕는 걸 꺼리며 동고트족이 리미니를 포위하고 있는 틈을 타 라벤나를 공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나르세스는 동고트족이 리미니를 취하면 전황이 불리해진다며 속히 구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던 중 요한네스가 속히 구원해달라고 호소하는 편지가 당도하자, 동로마군은 나르세스의 의견을 따르기로 결정했다. 벨리사리우스와 나르세스는 내륙의 산악 루트를 통해 리미니로 진군했다. 리미니를 포위한 동고트군은 구원군이 오는 걸 보고 재빨리 포위를 풀고 라벤나로 철수했다. 그후 요한네스는 노골적으로 나르세스의 명령만 들었고 리미니 구원을 성사시킨 나르세스에 대한 장군들의 평가도 올라갔다. 이로 인해 벨리사리우스와 나르세스의 사이는 불편해졌다. 두 사람은 앞으로 전쟁을 어떻게 이끌어갈 지에 대해서도 대립했다. 벨리사리우스는 안코나 인근의 동고트 거점인 아욱시움을 공략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나르세스는 그보다 방비가 덜한 아에밀리아를 먼저 공격하자고 주장했다. 벨리사리우스는 타협안으로 우르바눔 공격을 제안했고 나르세스도 이에 동의해 두 장군은 538년 여름에 우르바눔으로 진군했다. 그러나 나르세스는 벨리사리우스와 따로 진영을 차리며 거리감을 드러냈다. 또한 도시의 보급 사정이 좋은 것을 파악한 나르세스는 아르미니움으로 회군한 후 요한네스가 이끄는 분견대를 파견해 기어이 아에밀리아를 공략했다. 한편 우르비눔도 우물이 말라버리자 벨리사리우스에게 항복했다. 그러나 이 일로 벨리사리우스와 나르세스는 서로 화해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던 539년 초, 벨리사리우스는 1년간 동고트군에게 포위공격을 받고 있던 밀라노 구원을 위해 군대를 파견했으나, 구원군을 이끈 마르티누스와 율리아리스는 적의 규모가 워낙 많아 당해낼 수 없다고 판단하고 아에밀리아에 주둔한 요한네스와 유스티누스에게 함께 힘을 합칠 것을 제의했다. 그러나 그들은 나르세스의 명령이 있기 전까지는 출정하지 않겠다며 거부했고 결국 밀라노는 539년 3월 함락당하고 시민들 대부분이 학살당했다. 벨리사리우스는 밀라노의 참극의 원인이 나르세스를 따르는 부하들의 안일한 태도 때문이라고 비난했다. 유스티니아누스 1세도 벨리사리우스의 주장에 동의해 나르세스를 콘스탄티노플로 소환했다. 하지만 나르세스는 처벌을 받지 않고 황제를 모시는 환관으로서 직임을 수행했다. 특히 그는 이교도 박해 정책에 매우 적극적이었다.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535년경 그를 이시스 성전이 있는 이집트로 보내 이단을 근절하게 했다. 나르세스는 이시스 신을 모시는 제사장들을 투옥하고 사원을 약탈했다. 얼마 후 테오도르 지역 주교는 이시스 성전을 교회로 전환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