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나당전쟁 (문단 편집) ==== 정치·외교 분야의 준비 ==== 669년 정월, 당나라의 승려 법안(法安)은 신라에 자석을 요청했고, 앞서 말한대로 신라는 이에 자석 두 상자를 바쳤다. [[자석]]은 당시에는 지혈제로서 사용되었으며, 베이거나 창이 찔린 금창 치료에 사용되었다. (이현숙, <7세기 통일전쟁과 전염병>, 《역사와 현실》 47, 2003). 그런데 중국은 자석 산지가 따로 있을 만큼 자석에 대한 공급이 원활하던 나라다. 그리고 법안은 670년 무렵에 다른 당나라의 관리들과 함께, 고구려 부흥 운동을 일으킨 검모잠에게 살해당했던 인물로, 당시 각국의 승려들이 정보전달이나 정보수집 역할을 한 점에서 볼 때 당나라의 [[스파이]]였을 가능성이 높다.[* 이상훈, 《나당전쟁사연구》, 주류성, 2012, 80p] 당이 자석을 요구하고 신라가 헌상을 한 일은 기본적으로는 외교의 일환이지만, 한편으로는 정보 수집을 위한 나당간의 탐색전이라 볼 여지가 충분하다. 또 앞서 말한 대로 사죄사를 669년 5월 신라가 당에 보낸 것은, 4월 경에는 신라군의 일부가 백제 고지로 들어가 작전을 벌였기 때문이라는 것 말고는 설명할 방법이 없다. 신라는 당의 신속한 반격과 대응을 늦추기 위해, 또 급격한 정세 변화에서 신라인 자신들의 충격도 완화하기 위해 사죄사를 파견해 당나라를 안심하게 하며 시간을 벌었다. 그리고 668년 급찬 김동암이 왜국에 간 일도 주목할 수 있다. 이 시기는 고구려가 멸망하던 시점이므로, 신라가 벌써 이 무렵부터 향후 당나라의 충돌에 대비하여 왜가 어떤 태도를 취할지에 대한 타진과 왜와의 화해, 국교 재개 등을 모색하였던 것으로 볼 여지가 있다. 나당전쟁 직전 당 외에는 우방이 없던 신라가, 왜와 외교창구를 열어 후방의 염려를 줄인 후에 나당전쟁에 국가의 모든 역량을 집중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소형(小兄) 다식(多式) 등을 〔신라로〕 보내어 슬피 고하기를, “멸망한 나라를 일으키고, 끊어진 세대를 이어주는 것은 천하의 공의(公義)이니, 대국에 이를 바랄 뿐입니다. 우리나라의 선왕은 도리를 잃어서 멸망을 당하였지만, 지금 신 등이 나라의 귀족(貴族) 안승을 받들어 임금으로 삼았습니다. 원컨대 번병(藩屛)이 되어 영원토록 충성을 다하고자 합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그들을 나라 서쪽 금마저(金馬渚)에 정착하게 하였다. >---- >삼국사기 문무왕 10년(670) 669년 2월에는 신라에 호재가 생기는데, [[검모잠]]과 고구려 유민들에 의해서 보장왕의 뒤를 잇는 고구려왕으로 추대된 보장왕의 서자 안승이 4,000여 호를 이끌고 신라에 투항한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신라]]가 원병을 보내어 나라를 되찾는 것을 돕는다면 '신라의 울타리'가 되어주겠다"며 충성을 맹세했다. 문무왕은 고구려는 역사가 깊은 나라인데 [[연남건]] 형제 때문에 망했고, 고구려인들에게는 임금이 필요하다면서 사찬(沙飡) 수미산(須彌山)을 보내어 안승을 고구려왕으로 봉하고, 검모잠과 안승의 부흥군 세력에 [[군량미]]와 [[옷]] 등 전쟁물자를 보내주었다. 안승의 혈통에 대해서 기록의 차이가 있지만 일단 고구려 부흥 세력에 의해 고구려왕으로 추대될 만큼 고구려의 정통성을 대표할 만한 혈통을 가진 인물이었던 것은 분명하며, 안승을 이용해 나당전쟁 기간 동안 옛 고구려 영토 각지의 고구려 부흥군과 순조롭게 협력할 수 있게 되었다. 당군은 옛 백제 고토([[웅진도독부]])와 북쪽 고구려 고토([[안동도호부]])에 모두 있으므로 신라는 나당전쟁이 시작되면 [[양면전선]]에 휘말릴 위험이 있었는데 고구려 부흥군이 북쪽을 맡아주면 부담이 훨씬 줄어들게 될 것이었다. 물론 [[검모잠]]과 [[안승]]이 이끄는 고구려인들도 그저 신라의 도구가 되기 위해서 협조한 것만은 아니고, 궁극적인 목적은 고구려 부활이었을 것이므로 윈윈하는 관계라고 할 수 있었다.[* 첫 의도는 서로 윈윈하는 관계였지만 [[석문 전투]] 패전 등 나당전쟁 초기 당군의 대공세로 당군이 [[임진강]] 유역까지 밀어부치면서 고구려 부흥군의 목표는 좌절되었고, 고구려 부흥은 약 30여년이 지난 후 머나먼 동만주에서 [[발해]] 건국으로 이루어진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당의 견제 탓에 고려라는 국호는 쓰지 못하였다. 적어도 국호 기준으로 하면 고(구)려라는 나라는 901년 전에는 없었던 건 사실이다. 그마저도 신라는 발해라는 명칭 자체에 강력하게 반발하며 말갈 내지는 북국이라고 내내 비하했다. 그나마 발해로 이름 붙은 건 대조영의 진국과 당나라측의 오랜 밀고 당기기 끝에 성사된 타협의 결과였다.] 나당전쟁의 본격적인 개전이 670년 고구려 부흥군과 신라군이 함께 요동을 공격한 것이므로, 이미 이 669년 시점부터 비밀리에 연대하고 대당 개전을 준비했을 것이다. [[당나라]] 역시 신라의 주요 [[귀족]]들에 대한 회유를 여러 차례 시도하기도 했다. 우선 당대 신라 최고의 유력 정치인이었던 김유신에 대한 《삼국사기》 <열전>에 따르면 660년 백제 멸망 직후에 [[당고종]]은 김유신에게 군공을 치하하며 구 백제의 땅을 [[식읍]]으로 하사하려고 했지만 김유신은 이를 거절했다. 또한 665년과 668년에도 작호와 식읍을 하사하고, 김유신이 직접 당나라에 조회하러 오라 했지만 김유신은 가지 않았다. 이외에도 당나라에 일부 회유되어 첩자로 활동한 귀족도 있었는데, 문무왕은 이들을 조기에 적발해서 단호하게 숙청해 뿌리를 뽑았다. 662년에 진주와 진흠, 668년에 박도유, 670년에 수세, 673년에 대토가 반역 혐의로 처형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