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나당전쟁 (문단 편집) === 신라의 전쟁 준비 === 전쟁을 준비하는 태도는 승리를 위한 필수불가결한 조건이다. 《삼국사기》 <김유신 열전>에 따르면 신라는 이미 660년 백제 멸망 직후, 신라군을 백제군 복장으로 변장시켜 당군과 싸우게 하자는 강경한 제안이 무열왕 면전에서 나오고, [[김유신]]이 여기에 찬성할 정도로 이미 나당전쟁의 불씨를 초기부터 예상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당시에는 친왜적인 [[부여풍]] 등의 백제 부흥군, 한반도에 파병을 준비하고 있었던 바다 건너 왜국, 그리고 고구려라는 나당 공동의 적이 남아있었던 시기라 나당간의 직접 충돌은 늦춰질 수밖에 없었다. 나당간의 군사적 충돌에 관한 구체적인 기록으로 670년 3월, 신라군과 고구려 유민군이 합동으로 [[압록강]] 이북의 오골성 방면으로 진격, 4월 4일 말갈병을 박살내버렸다는 기록이 있다. 전쟁은 가장 늦게 잡아도 이 시기에는 벌어졌으므로, 전쟁 준비는 그 이전부터 진행되어 왔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이보다 앞서, 신라는 669년 5월, 당나라에 급찬 지진산(祗珍山) 등을 당나라에 보내 자석 두 상자를 바치고, 사죄사로 [[각간]] [[김흠순]]과 [[파진찬]] [[김양도]]를 파견하였다. 김흠순은 김유신의 동생이자 오랫동안 전장에서 공을 세운 최고위 귀족 중 한 명이었고, 김양도 역시 파진찬으로 고위 귀족이었다. 신라 조정이 이런 고위 귀족들을 보내어 '사죄'할 건이 무엇일까? >10년(670) 봄 정월에 고종이 흠순(欽純)에게는 귀국을 허락하였지만 양도(良圖)는 억류하여 감옥에 가두었는데 마침내 감옥에서 죽었다. 왕이 마음대로 백제의 토지와 남은 백성을 빼앗아 차지하여 황제가 책망하고 성내면서 거듭 사신을 억류하였기 때문이다. >----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642696&cid=49625&categoryId=49798|《삼국사기》 제6권 <신라본기> 제6 문무왕 상]] 이 기사에서 말하는 '사자를 재차 억류' 하게 한 사건과 처음 김흠순 등이 '사죄사'로 가게 된 건이 같은 종류의 사건인지 별개의 일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하지만 '''왕이 마음대로 백제의 토지와 남은 백성을 빼앗아 차지하여''' 라는 기록이 있고, 또 이 이야기가 당나라에 보고되기까지의 시간을 고려하면 이 백제 지역에 대한 신라의 공격은 669년 중반쯤에는 이미 이루어졌다는 것은 확실하고, 670년 3월에 이루어진 신라와 고구려 유민군의 요동 공격 역시 이 무렵에는 계획이 세워져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김유신의 동생이자 문무왕의 외숙인 각간 김흠순, 고위귀족 파진찬 김양도를 목숨마저 보장할 수 없는 '사죄사'로 파견해야 할 만큼 중대한 일은, 당나라가 일단 웅진도독부를 두어 지배하고 있던 구 백제 지역에 대한 신라군의 공격 말고는 따로 떠올리기 어렵다. 아마 백제 지역 공략을 위한 탐색전을 벌였는데, 당이 항의하자 이를 일시적으로 무마하고 시간을 벌기 위해, 달리 말하면 당의 신속한 반격을 늦추기 위해, 김흠순과 김양도가 669년 5월에 사죄사로 파견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669년에 있었던 174개 목장 분배 기사를 이와 연결시키기도 한다. 174개 목장의 구체적 위치가 기록에 명시된 것은 아니지만, 무려 174개나 되는 목장을 한꺼번에 여러 신하들에게 분배한다는 것은 군공 포상으로서 새로 확보된 지역은 당나라에게서 빼앗은 구 백제 영역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즉 669년에 구 백제 영역의 상당 부분을 신라가 새로 점령했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그러나 전쟁을 원해 편제를 개편하는건 흔히 있는 일이기에 아닐 수도 있다.] 그렇다면 나당전쟁의 실질적인 개전 시점은 669년 5월 이전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이 일에 나선 김흠순과 김양도 등이, 자신들이 무사 귀환을 장담할 수 없음을 모르고 당나라로 떠났을 거라고는 보기 힘들다. 어떤 희생이라도 감수하겠다는 식으로 [[목숨은 내다버리는 것]]처럼 여긴 그들의 결연한 태도가 신라에게 귀중한 시간을 벌어다 주었다. 결국 670년 당은 김흠순은 돌려보내지만 김양도는 감옥에 가뒀는데 김양도는 곧 죽고 말았다. 그리고 당나라는 김양도를 죽게 한 이유로 '문무왕이 마음대로 백제의 토지와 백성을 차지했기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다. 이처럼 나당전쟁의 개전 시점은 가장 늦어도 670년 3월에서, 빠르면 669년 봄 무렵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668년에 고구려가 멸망하였으니, 고구려가 멸망하고 670년에 신라가 당을 분명하게 선제 타격하기 전까지의 시간, 즉 669년의 움직임에 주목을 해야 할 필요가 있다. 실제 신라는 그 시기 대내외적으로 적지 않은 정책을 시행하고 있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