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나당전쟁 (문단 편집) ==== 군사적 원인 ==== '''군령권은 실질적인 군대의 운용 및 통솔과 직결되는 군에 대한 지휘·명령·감독권이다.''' 이러한 군에 대한 군령권은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최고 군사통수권 가운데 내포되어 있는 것이 보통일 것이다. 그런데 '''나당동맹이 결성되고 백제와 고구려에 대한 대규모 원정이 진행되면서, 당나라는 스스로 상국이라는 자부심에 입각해 신라 국왕의 군령권을 심하게 훼손했다'''. >3월, 당 고종이 좌무위대장군(左武衛大將軍) 소정방을 신구도행군대총관(神丘道行軍大摠管)으로 삼고 김인문을 부대총관(副大摠管)으로 삼아, 좌효위장군(左驍衛將軍) 유백영(劉伯英) 등 수군과 육군 13만 명을 거느리고 백제를 정벌하도록 하였다. 또 '''칙명으로 임금을 우이도행군총관(嵎夷道行軍摠管)으로 삼아 병사를 거느리고 그들을 지원하게 하였다.''' > >(중략) > >'''정방이 기뻐하며 법민을 돌려보내 신라의 병마를 징발하도록 하였다.''' >----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642694&cid=49625&categoryId=49798|《삼국사기》 제5권 <신라본기> 제5 태종왕]] 660년 나당연합군의 백제 원정에 앞서 당은 신라 왕을 우이도행군총관에 임명하고, 신라의 병마를 징발케 하였다. 이때의 모습을 보면 신라 왕이 당나라의 1개 행군총관으로 전락한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이는 큰 문제가 아니었다. 이 행군의 병력은 모두 신라군으로 구성되어 신라 왕이 신라군을 그대로 지휘·통솔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는 나당 연합군에 의한 백제와 고구려 원정이 진행되면 될수록 당군의 영향력이 확대되고 신라 왕의 군령권이 약화된 것이었다. 당군에 의한 신라 왕의 군령권 행사 제한은 여러 가지가 있었는데 '''첫 번째는 지휘·통솔권의 문제였다'''. >유신 등이 당나라 군대의 진영에 이르자, '''정방은 유신 등이 약속한 날보다 늦었다는 이유로 신라의 독군(督軍) 김문영(金文穎),,【혹은 영(永)이라고 한다.】,,을 군문에서 목 베려 하였다.''' >----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642694&cid=49625&categoryId=49798|《삼국사기》 제5권 <신라본기> 제5 태종왕]]''' ---- >9월 23일, 백제의 남은 적군이 사비성에 들어와, 살아남아 항복한 사람들을 붙잡아 가려고 하였으므로 '''유수(留守) 유인원이 당과 신라인을 내보내 그들을 쳐서 쫓아내었다. ''' >----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642694&cid=49625&categoryId=49798|《삼국사기》 제5권 <신라본기> 제5 태종왕]]''' ---- >'''당나라 황제가 조칙으로 유인궤(劉仁軌)에게 대방주자사(帶方州刺使)를 겸직하게 하여 이전의 도독 왕문도(王文度)의 군사를 통솔하고 우리 병사와 함께''' 백제의 군영으로 향하게 하였다. >----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642696&cid=49625&categoryId=49798|《삼국사기》 제6권 <신라본기> 제6 문무왕 상]]''' 첫 번째 기록을 보면 소정방이 김유신과 아무런 협의도 없이 신라군의 김문영을 임의로 처벌하려고 했다. 결국 김유신의 반발로 무산되기는 했지만, 당군은 신라군보다 우위에 있다는 태도를 견지하고 있었다. 이러한 인식과 행동은 이후에 점차 강화되어 나갔다. 두 번째와 세 번째 사례를 보면, 웅진도독부에 주둔하고 있던 당군과 신라군이 모두 당의 장군에 의해서 지휘되며 통솔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즉, 660년 백제 멸망 이후 당군은 백제 주둔 신라군에 지휘·통솔권을 일부 행사하고 있었던 것이다. '''두 번째로 장수의 임명권에 관한 부분이다'''. >당나라 황제가 칙명으로 지경(智鏡)과 개원(愷元)을 장군으로 삼아 요동의 전장에 가도록 하였다. 임금이 곧장 지경을 파진찬으로 삼고, 개원을 대아찬으로 삼았다. 또한 황제가 조칙을 내려 대아찬 일원(日原)을 운휘장군(雲麾將軍)으로 삼자, 왕은 일원에게 명하여 궁궐의 뜰에서 칙명을 받도록 하였다. >----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642696&cid=49625&categoryId=49798|《삼국사기》 제6권 <신라본기> 제6 문무왕 상]]''' 해당 기사를 보면, 고구려 원정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당이 신라의 지경과 개원, 그리고 일원을 당의 장수로 임명하여 전장에 투입시키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반면 신라 왕은 단순히 이를 수용하고 인준하는 수준에 머물고 있다. 신라가 모든 장군에 대한 임명권을 당나라에게 넘겨준 것은 아닐 테지만, 최소한 당은 원하는 인물을 자기 마음대로 임명해 신라 왕에게 통보할 수 있었다. 이러한 상황은 목전의 고구려 원정이 계획되어 있었다고 하더라도, 일국의 군통수권자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일이었을 것이다. '''셋째로, 병력 징발권의 문제다.''' >당 고종이 유인원과 김인태(金仁泰)에게 명하여 비열도(卑列道)로 가도록 하고, 또 우리 병사를 징발하여 다곡(多谷)과 해곡(海谷) 두 길을 따라 평양에 모이도록 하였다. >----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642696&cid=49625&categoryId=49798|《삼국사기》 제6권 <신라본기> 제6 문무왕 상]]''' 당 고종은 백제 진장인 유인원으로 하여금 비열도를 따라 신라의 군사를 징발케 하였다. 이는 신라의 병력 징발을 신라군에게 위임하는것이 아니라, 당군이 직접 징발·편성하여 당군에 편입시키고 있는 것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즉, 당은 장군 임명에서 나아가 병력 편성까지 주관하게 되었던 것이다. 물론 이 경우도 장군 임명 때와 마찬가지로 신라의 전 병력을 당군이 장악한 것은 아니었지만, 당군이 신라의 백성을 마음대로 징발할 수 있었다는 것이라서 그 의미하는 바가 결코 작지 않다. '''넷째로, 군사작전권에 관한 문제이다'''. >유신 등은 병사를 쉬게 하면서 다음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당나라 함자도(含資道) 총관 유덕민(劉德敏)이 와서 평양으로 군량을 보내라는 황제의 칙명을 전하였다. >----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642696&cid=49625&categoryId=49798|《삼국사기》 제6권 <신라본기> 제6 문무왕 상]]''' ---- >10월 2일에 영공(英公)이 평양성 (平壤城)의 북쪽으로 2백 리 되는 곳에 도착하였다. 이동혜(尒同兮) 촌주(村主) 대나마(大奈麻) 강심(江深)을 뽑아 보내면서 거란(契丹) 기병(騎兵) 80여 명을 이끌고 아진함성 (阿珍含城)을 거쳐 한성(漢城)에 이르러 편지를 전하여 군사 동원 시기를 독려하니 대왕이 따랐다. >----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642696&cid=49625&categoryId=49798|《삼국사기》 제6권 <신라본기> 제6 문무왕 상]]''' ---- >정방은 군량을 얻자 곧 전투를 그치고 돌아갔다. >----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642696&cid=49625&categoryId=49798|《삼국사기》 제6권 <신라본기> 제6 문무왕 상]]''' ---- >유신(庾信) 등은 당나라 군사들이 돌아갔다는 말을 듣고 역시 군사를 돌려 과천(果瓜川)을 건넜다. >----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642696&cid=49625&categoryId=49798|《삼국사기》 제6권 <신라본기> 제6 문무왕 상]]''' ---- >그래서 성을 막 깨뜨리려고 할 때 영공이 보낸 강심(江深)이 와서 ‘대총관의 처분을 받들어 신라 병사와 말은 성을 공격할 필요없이 빨리 평양으로 와 군량을 공급하고 모이라’고 말하였습니다. 행렬이 수곡성(水谷城)에 이르렀을 때 대군이 이미 돌아갔다는 말을 듣고 신라 병사와 말도 역시 곧 빠져나왔습니다. >----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642698&cid=49625&categoryId=49798|《삼국사기》 제7권 <신라본기> 제7 문무왕 하]]''' ---- >처음에 당나라 군사가 고구려를 평정할 때 왕은 한성(漢城)을 출발하여 평양(平壤)에 이르러 힐차양(肹次壤)에 도착하였는데, 당나라의 여러 장수가 이미 돌아갔다는 말을 듣고 돌아와 한성에 이르렀다. >----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642696&cid=49625&categoryId=49798|《삼국사기》 제6권 <신라본기> 제6 문무왕 상]]''' 첫 번째 사례를 보면 당이 자신들에게 필요한 신라군의 식량 수송이나 행군 독려시에는 철저히 조서나 서신을 보내어 명령을 전달하였다. 그런데 그 뒤의 기사들을 보면 '''나당 연합군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정보 공유가 전혀 되지 않고 있다. 신라군은 당군의 연락하에 철수한 것이 아니라, 매번 당군이 '이미' 돌아갔다는 말을 듣고 나서야 철수할 만큼 작전에서 철저하게 배제되고 소외되어 있었다. 심지어 신라 왕이 직접 참전했음에도 당은 신라에게 정보 전달을 제대로 해주지 않았고, 군사작전권도 오로지 당군에게만 있었으며, 신라는 이를 수동적으로 따라야만 했다. 백제 원정 후 신라는 웅진도독부 신라인 주둔군에 대한 지휘권을 일부 이양해야 했고, 고구려 원정에서는 장군임명권과 병력징발권까지 당이 마음대로 행사하는 상황을 지켜보기에 이르렀으며, 정보 전달이나 작전계획은 협의가 아니라 일방적 통보 내지는 미통보로 이루어졌다. 한마디로 나당 연합군은 점차 평등관계에서 종속관계로 이행되고 있었던 것이다. 신라는 삼국통일전쟁을 거쳐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켰지만 그 대가로 영토를 얻은 것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왕권과 신라군의 입지가 강화된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왕권의 추락과 신라군의 사기저하가 일어나면서 내부적으로 당에 대한 불만이 커지기 시작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