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나당전쟁 (문단 편집) ==== 일제강점기 일본 학자들의 견해 ==== [[근대]] 이후 나당전쟁을 본격적으로 검토한 이는 일제시기 [[일본]]의 학자, 쓰다 소우키치(津田左右吉)와 이케우치 히로시(池內宏)였다. 쓰다 소우키치는 [[와세다대학]]에서 [[이병도]]를 지도한 사람이며, 이케우치 히로시는 1920년부터 [[광해군]]에 대해 처음으로 긍정적인 평가를 시도한 사람이다. 그러나 이케우치 히로시의 이러한 의도는 일제의 식민사관인 만선사관(滿鮮史觀)의 일환으로, 조선이 문약하고 당파사움에 시달렸다는 식의 이야기로 연결될 수도 있고 거기에 맞춰 만주사 쪽에 연결하여 편협하게 추켜세워 올린 것에 가깝다. 쓰다 소우키치는 백제, 고구려 고지는 당 본토에서 거리가 멀어 [[교통]]이 불편하고 유민들이 복종하지 않았는데, 이러한 허점을 신라가 이용해 병탄했다고 보았다. 또한, 《삼국사기》에서 신라가 승리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 [[매소성 전투]]는 신빙할 수 없다고 했다. 이케우치 히로시는 나당전쟁을 신라와 당이라는 국가 대 국가의 전쟁으로 본 것이 아니라, '''신라의 욕심'''으로 당이 정벌을 단행한 것으로 인식했다. 즉 [[검모잠]]의 '반란'을 지원하던 신라가 당이 차지하고 있던 백제 고지를 '침략' 했기 때문에, 당이 이에 대한 조치로서 신라를 '정벌' 하게 되었으며, 이후 [[안동도호부]]가 [[요동]]으로 이동하면서 한반도는 '방기'되었다는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