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나당전쟁 (문단 편집) === 나당전쟁 때문에 토번이 성장? ===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이지만, 결론만 말하면 '''나당 전쟁이 아니라 고구려-당 전쟁 때문이다.''' [[토번]]이 [[당나라]]를 위협할 정도로 커지게 된 것은 617년 ~ 649년에(추정) 재위했던 '''[[손첸감포]]'''라는 희대의 명군이 즉위한 때부터였다. 즉 나당전쟁이 아니라 '''수나라 때 부터 수십 년간 지속된 고구려와의 전쟁으로 인해 토번의 세력이 강력해지는 것을 견제하지 못한 것이 원인'''이었고, 나당전쟁 시기에는 이미 토번이 강력해진 상태였다. 나당전쟁 때문에 토번이 커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손첸 감포에 의해 토번의 국력이 급격히 팽창하여 당 제국과 서역교역로를 두고 패권을 다투면서 당 제국의 한반도에 대한 중요도가 급감하게 되었다.[* 엄밀히 말하면 한반도에 대한 중요도나 토번에 대한 것 둘다 모두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고구려 유민들이 당의 지배권을 이탈해서 옛 영토로 이동, 발해를 건국했기 때문. 이들은 당의 통치하에 있었다가 탈출했기 때문에 당에 우호적이지 않았고 옛 고구려 영토들을 계속 잠식해나갔다. 게다가 한동안 당의 통치하에 안정적인 것처럼 보이던 요동에서 돌궐, 거란의 무리들이 발해와 연합하여 요동 지역에서 자립, 준동하였다. 결국 고구려를 무너뜨리고 애써 당나라 중심으로 질서를 잡은 요동 지역은 다시 개판이 되었다. 급 성장한 토번이 버거운 상황에서 당은 신라를 동맹으로 두어 발해를 견제하고 유사시 동원할 수 있는 우군으로 만드는 것이 나았지 적으로 만들 이유는 없었다.] 당시 당 제국은 서역과 활발한 교류를 진행하였는데 이를 강성해진 토번이 가로막고 훼방을 놓아버린 것이 결정적이었다. 토번은 당 제국의 종속국이었던 토욕혼을 정복하고, 가르친링의 지휘 아래 '''[[대비천 전투]]'''(670. 7)에서 10만의 당군을 궤멸시키며 지휘관들인 설인귀, 곽대봉, 아사나도진을 사로잡는 등 당 제국의 골칫거리가 되었다. 이후 [[696년]] 3월에 토번은 당의 수도 장안에서 320km 떨어진 '''소라한산(素羅汗山) 전투'''에서 당의 대군을 또다시 격파했다. 이때문에 당나라는 대패의 책임을 물어 사령관 왕효걸의 작위를 박탈하여 평민으로 격하하고 부관 누사덕은 강등시켰다. 이는 신라와의 갈등[* 신라는 자신의 안전을 위한 수동적인 전쟁이었지 토번처럼 당 제국의 패권에 도전할 의도는 아예 없었다.]과 달리 토번 제국이 아예 당의 존립까지 위협하는 실질적인 위험으로 부상했기 때문이다. 수도 장안에서 훨씬 가까운 것도 토번이었기 때문에 토번 전선이 훨씬 위급하기도 했다.[* 나당전쟁이 당의 영토 확장을 위한 공세였다면 토번-당전쟁은 당 제국이 토번에 의해 대대적으로 공격당하는 위급 상황이었다. 당연히 후자의 중요성이 더 커지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게다가 교역로 문제도 겹쳐있었기에 결과적으로 경제적, 군사적으로 신라와 대립하는 한반도/만주 쪽은 토번이 준동한 서역에 비해 전략적인 중요도가 아주 크게 떨어졌다.] 물론 비슷한 시기에 발생한 일이고, 나당전쟁 때문에 대토번 서역 전선에 투입할 당군의 병력이 줄어들었으니 토번에게 나당전쟁은 과정상에서 간접적으로 도움을 주었다고 할 수 있겠지만[* 예를 들어 [[유인궤]]는 나당전쟁 당시 신라 전선에 있다가, 676년 전쟁이 끝나자마자 대륙 반대편 서역 전선에 투입되었다. 즉, 만약 당이 토번하고만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고 가정하면 토번은 좀 더 많고 강한 당군을 상대해야 했을테니 나당전쟁과 토번이 간접적인 관련이 없진 않다.] 역으로 신라 역시도 토번 전선에 당군이 투입되어 이득을 보았다.[* 이에 멍청하게 이중전선을 형성한 당나라가 바보인 것으로 보는 의견과 함께 신라와 토번의 위험성 중 신라의 위험성이 보잘 것 없고 당 제국의 패권에 도전할 의사가 없는 수동적인 방어자세임을 꿰뚫어본 당이 이후 신라와의 대립관계를 청산하여 이중전선을 바로 하나의 전선으로 축소해 버리고 토번과의 전쟁에 집중해버렸기에 마냥 멍청하다고 비하할 수는 없다는 의견이 있다. 실제로 신라는 나당전쟁 승전 후 당 제국의 변방을 어지럽히는 일을 벌이지 않았다. 그러기에는 또 [[발해|엄청난 놈]]이 하나 북쪽에서 등장하는 바람에 직접 국경을 맞대지도 않았고…] 여담으로 설인귀는 [[대비천 전투]]에서 대군이 궤멸당한 대패의 책임을 추궁당해 모든 관직을 박탈당하고 서민으로 강등당했다. 이후 간신히 용서를 받고 참전한 것이 나당전쟁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