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나당전쟁 (문단 편집) === 당-신라 관계 정상화 === 그래서 당나라가 옛 고구려, 백제 영토를 신라 땅으로 공식 인정한 것은 [[성덕왕]] 시기였다. 언제까지나 초강대국 당나라와 척질 수도 없는 노릇이었기에 성덕왕은 당나라와의 관계 회복을 위해 빈번하게 사신을 파견하여 관계 개선을 도모했다. 당나라에 사신을 보낸 횟수를 세어보면 [[문무왕]] 14회, [[신문왕]] 1회, [[효소왕]] 1회, [[성덕왕]] 46회다. 전쟁으로 거의 끊겼던 관계를 성덕왕 때 완전히 회복한 것이다. 714년에는 통문박사라는 대당 외교 문서 담당 기관을 만들기도 하였으며, 신문왕 때 설립한 [[국학]]의 내실을 보강하기 위해 당나라의 국학 문화를 수용했다. 그리고 730년대 [[흑수말갈]]과 [[대문예]] 문제로 동아시아 정세가 다시 시끄러워지자 당나라도 더 이상 신라를 마냥 적대하고 있을 수 없다고 판단했다. 이에 나당전쟁 후 60여년이 지난 735년에 당나라는 [[대동강]] 이남의 고구려, 백제 땅에 대한 지배권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게 되었다. 마치 지난 세기 북방의 고구려를 견제하기 위해 남방의 신라와 손을 잡은 것처럼 북방의 발해 견제 차원에서 다시금 신라의 효용성이 드러난 것이다. 신라 역시 그동안 대동강 이남 ~ 임진강 이북 지역, 즉 개성을 포함한 패서 지역은 물론 신라가 실질적으로 영향력 아래 두고 있긴 했으나, 당나라와의 이런 대립 탓에 대놓고 직접 지배까진 하진 못하고 있었다. 무려 60년 동안인 이 세월 동안 옛 고구려의 핵심 지역 고구려 유민들은 상당한 자치를 누리고 살 수 있었으며, 그 때문에 발해 건국기에 [[백산말갈]]을 비롯한 고구려 유민들이 또 다시 아무 장애 없이 해당 지역에 유입될 수 있었다. 735년부터 신라는 당나라와의 영토 분쟁 구실이 사라진 이후에도 영향력을 확고히 하기 위해 임진강에서부터 점점 전진해갔지만, 곧바로 직접 지배 체제로 편재하려 하진 않았다. 때문에 끝내 재령강 이동 지역, 즉 황해도 동부 14개 군현만 편재했을 뿐 재령강 이서 지역은 군현을 편재하지 못했다. [[헌덕왕]] 때 재령강 이서 12개 군현을 편재했다는 과거의 오해가 있었으나 이는 태봉 시대에 궁예가 편재한 군현이었음이 규명되어 있다. 패서 지역을 포괄한 한산주가 지나치게 담당 영역이 넓었고, 패서 지역만은 유독 신라 관헌의 수가 적었고 직급수도 낮은 편이었으며 상당 부분 다른 지역보다 자치가 허용되었음은 '전덕재, 신라 하대 패강진의 설치와 그 성격. 2013년 발간' 논문에서 규명된 사항이며, 그리고 신라의 관헌 설치나 개입 정도도 당나라와의 관계 탓에 시기가 상당히 늦어질 수밖에 없었다.[* 신형식 저서 신라통사 참조. 2004년 발간.] 신라가 패서에 26개 군현을 설치 완료한 시기는 헌덕왕 시기(강봉용,신라 하대 패강진의 설치와 운영)라는 연구가 있었으나 이는 상당히 과거의 연구로서, 현재는 신라가 헌덕왕 때까지도 재령강 이동 지역에 14개 군현을 설치한 것에 그쳤고, 재령강 이서 12개 군현까지 편재를 완료해서 직접 지배를 관철한 건 태봉이었음이 규명되어 있다.(전덕재, 신라의 북진과 서북 경계의 변화, 2016년)(전덕재, 태봉의 지방제도에 대한 고찰, 2022년 발간 경주문화원 발간 경주문화 제27호) 이렇게 당과 신라의 미묘한 관계 탓에 꽤 오랫동안 독자성을 유지한 [[패서]] 고구려 유민들이 끝내 고려의 주축이 되어 신라가 실패한 삼한일통을 완성하면서 한반도의 새로운 주인이 되는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