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나당전쟁 (문단 편집) === 옛 백제 영토에서의 충돌 === 신라군이 요동과 웅진도독부를 공격해 전면전이 확실시되자 예상대로 당에서도 격노하며 반응을 해왔다. <답설인귀서>에 따르면 신라 사신 [[김흠순]]이 당에 갔다가 신라로 귀국했는데 김흠순이 말하길 당이 앞으로 신라와의 국경 설정을 다시 하려고 하는데 이를 위해 작성된 지도에서는 신라가 지배하기 시작한 옛 백제 땅을 모두 웅진도독부에 되돌려주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당나라도 취리산 회맹을 뒤엎고 신라를 압박하는 모양새를 취했고, 신라 내부에서도 '하나의 나라로 만들어 길이 뒷날의 근심이 없게 하자'고 해 웅진도독부를 완전히 병합하자는 것으로 여론이 모였다. 직후 위에서 언급했듯 670년 7월 웅진도독부의 백제인 사마 예군을 붙잡아 가두고 품일, 문충, 중신, 의관, 천관 등이 성 63곳을 쳐서 빼앗으며 그곳의 백성들을 신라 내지로 옮기는 대승리를 거뒀다. 670년 9월에는 나름대로 신라의 입장을 적어 당나라에 사신단을 보냈지만 날씨가 좋지 않았는지 바다에서 표류해 당에 도달하지 못했고 웅진도독부는 신라가 반역한다고 당나라에 보고해(<답설인귀서>), 당 조정은 670년에 설인귀를 계림도행군총관으로 임명해 신라를 정복할 것을 명령했다(《구당서》 <설인귀전>) 671년 1월에 문무왕은 당주(幢主) 부과(夫果)에게 백제(웅진도독부) 변방의 [[벼]]를 짓밟게 해 마침내 신라군과 당군간의 전투가 벌어졌는데(<취도 열전>) 이 전투의 승패는 기록에 없지만 부과가 용감하여 자신을 돌아보지 않고 싸워 전사했다는 것으로 봐선 신라군이 패배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 웅진도독부에는 [[말갈]]인 군대가 도착하게 되는데 아마도 당측에서 웅진도독부를 구원하기 위해 당나라의 본토 군대를 보내기 전에 미리 요동 지역의 말갈군을 해로를 통해 보낸 것으로 보인다(이상훈). 말갈군이 671년 1월 설구성(舌口城)을 포위하고 있다가 이기지 못하고 퇴각하려 하자 이때 신라군이 병사를 내어 격파하고 300여 명의 목을 베었다. 그리고 신라군은 당나라 본토에서 웅진도독부를 구원하기 위해 바다를 넘어오는 군대를 막기 위해 대아찬 진공 등을 보내 옹포(甕浦)를 지키게 했다. 이렇게 두 나라간의 밀고 밀리는 싸움이 계속되는데 671년 6월 '''석성 전투'''에서 신라군은 당나라 군사 5,300명의 목을 베고 백제계 당나라 장군 2명과 당나라의 과의(果毅) 6명을 사로잡는 전과를 올렸다. 당나라의 1개 행군이 10,000~12,500명 수준인 것을 감안하면 황해를 건너온 설인귀의 계림도행군은 이 석성 전투에서 큰 피해를 입고 방어는 몰라도 공세는 더 이상 힘든 상태가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신라군은 장군 [[죽지]]를 보내 가림성의 벼를 짓밟게 하는 등 당군의 보급을 방해하고, 군량미를 소모하는 전략을 계속했다. 같은 해 7월 26일, 대당총관 [[설인귀]]는 임윤법사(琳潤法師)에게 편지를 맡겨서 문무왕에게 책망하는 글을 보냈다. 지금으로 치면 외교적으로는 주한대사, 군사적으로는 인민해방군 사령관이 대한민국 대통령에게 압박하는 글을 보낸 꼴이다. 이에 신라에서는 [[강수]]가 '<답설인귀서>'를 써보내면서 명분을 세웠다.[* 이 '<답설인귀서>'는 전문이 기록에 남아있어 당시 국제정세를 파악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다만 <답설인귀서>는 당나라 장수 설인귀에게 대답하며 '신라의 행동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문서'이므로 몇 가지 거짓말이 들어있다. 예를 들면 문무왕은 설인귀의 당군이 바다를 건너온 것을 모르고 있었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1월부터 당군이 황해를 건너올 것을 대비해 옹포에 병력을 배치시키기도 했다.] <답설인귀서>를 보낸 직후 '''소부리주(所夫里州)'''를 설치하고 아찬 진왕을 도독으로 임명하는데, 소부리주는 백제의 옛 수도 [[사비성]]을 말한다. 신라군이 당군을 몰아내고 옛 백제 영토를 많이 점령했다는 뜻이다. 10월에는 [[황해]]를 건너오던 당나라 수송선 70여 척을 쳐부수고 당의 낭장 겸이대후와 군사 100명을 사로잡는 성과를 올렸다. 한편 《[[삼국유사]]》에도 같은 시기의 사건으로 보이는 부분이 있는데 <문무왕조>에 의하면 671년에 당나라 장수 조헌이 50,000명의 수군을 이끌고 쳐들어왔을 때 [[명랑#s-2]]이 일종의 도술인 '문두루 비법'을 사용해 배를 침몰시켰다고 쓰고 있다. 물론 이는 다분히 설화적인 이야기지만 [[여몽연합군의 일본원정]] 당시 태풍에 [[카미카제]]라는 의미를 부여한 것처럼 실제로 폭풍으로 좌초한 일화에 의미를 부여한 것일 수도 있는 것이, <현령곽군묘지명(縣令郭君墓誌銘)>[* 중국 [[낙양]]의 낙양고대예술관에 소장된 [[금석문]].]에 따르면 곽행절(郭行節)이 나당전쟁에 참전했다가 671년 배가 풍랑으로 부서져 익사했다고 되어있어 실제로 폭풍이 불었던 것 같다. 672년 1월에 신라군은 백제(웅진도독부) 고성성(古省城)을 점령했다. 2월에는 신라군이 [[사비성]] 근처의 가림성을 공격했으나 점령하지 못했다. 가림성은 [[부여풍]]이 부흥운동을 할 때도 함락하기 어렵다고 당군이 공격하지 않은 난공불락의 요새였고, 나당전쟁 개전 초반부터 가림성 주변의 논밭을 짓밟는 등 충돌이 계속된 곳이었다. '''그런데 이것이 신라와 [[웅진도독부]] 백제의 기록상 마지막 전투다.''' 일단 가림성 전투에서 백제인들이 방어에 성공했기 때문에 한동안은 더 싸웠다는 추정은 가능하지만, 어떤 식으로 전황이 전개됐는지에 대한 기록이 누락되어 있다. 이 때문에 [[웅진도독부]]가 지배하던 옛 백제 영토를 신라가 완전히 장악한 시점은 학자에 따라 672년설과, 나당전쟁이 완전히 끝난 676년설로 나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