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나당전쟁 (문단 편집) === 고구려 부흥군의 붕괴 === 신라와 힘을 합쳐 나당전쟁을 개전한 고구려 부흥군은 고간과 이근행이 지휘하는 당나라의 토벌군이 다가오자 이에 대비해야 했지만 여기서 문제가 발생했다. 실질적으로 부흥운동을 처음부터 주도해 온 [[검모잠]]과, 도중에 합류해 고구려 왕가의 정통성을 가진 [[안승]] 두 부흥군 지도자간에 의견이 맞지 않았는지 내분이 발생한 것이다. 검모잠은 지금의 [[황해도]]인 한성의 유력세력으로 이곳을 기반으로 당군을 막고자 했던 것 같지만 안승은 어떤 판단을 하였는지는 모르지만 정황상 겁을 먹고 신라로 도주하려고 했던 것 같다. 결국 670년 6월 안승은 검모잠을 죽이고 신라로 향했다. 이전에 [[백제부흥운동]] 때 일어났던 부흥군의 내분이 거의 비슷하게 다시 재현된 것이다. 문무왕은 안승을 받아들여 지금의 [[익산시]]인 금마저에 정착하게 했다. 안승뿐만 아니라 많은 고구려인이 호남으로 이주한 것 같은데 이후 670년 8월 1일에는 금마저의 안승을 '고구려왕'에 책봉해 형식적으로 고구려를 신라의 신하국으로 삼았고, 이후 안승의 고구려인 집단은 신문왕 시대까지 고구려의 관직체계를 그대로 따르는 등 자치를 하게 되었다. 아무튼 결국 고구려 부흥군은 어이없이 내분으로 소멸해버렸고, 당군이 남하해 본격적인 신라군과의 충돌이 671년경부터 시작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