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나당전쟁 (문단 편집) === 개전 : 신라의 요동 선제 공격 === 668년 고구려 멸망 후, 신라는 당의 야욕과 하대에 더는 참지않고 맞서기 시작했다. 670년 3월, 신라의 [[설오유]](薛烏儒)와 고구려 부흥세력의 [[고연무]](高延武)가 지휘하는 연합군 20,000명이 전격적으로 [[압록강]]을 건너 [[요동]]의 '''오골성을 선제 공격'''했는데, 이 시점이 바로 나당전쟁의 본격적인 신호탄이었다. 물론 양면전쟁 위험과 원격지 요동을 오랫동안 점령할 순 없었고 몇 달간의 일시적 점유였지만, 이 공격으로 인해 신라는 나당전쟁 초기의 주도권을 가져왔고, 북쪽에서 시간을 번 동안 671년까지 당군이 지키던 백제 고지를 대부분 영토화하였다. >3월, 사찬 설오유(薛烏儒)가 고구려 태대형 고연무(高延武)와 함께 각기 정예병 10,000명을 거느리고 압록강(鴨淥江)을 건너 옥골(屋骨)▨▨▨[* 원문에 3글자 빠져 있음.]에 이르렀는데, 말갈의 병사들이 먼저 개돈양(皆敦壤)에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중략) >여름 4월 4일에 맞서 싸워 우리 군사가 크게 이겨 목베어 죽인 숫자를 가히 헤아릴 수가 없었다. 당나라 군사가 계속 이르렀으므로, 우리 군사는 물러나 백성(白城)을 지켰다. >----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642696&cid=49625&categoryId=49798|《삼국사기》 제6권 <신라본기> 제6 문무왕 상]] 신라의 수도 경주에서 [[오골성]]([[랴오닝성]] 봉황성)까지는 약 1,850리(740km), 서울에서 오골성까지는 약 1,000리(400km)이다. 당시의 1일 행군 속도는 30리(12km)~60리(24km)였다.(이상훈, 《나당전쟁연구》). 장거리에다 대규모의 행군이었으므로 1일 평균 30여리로 행군했을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이들 부대가 경주 인근에서 출발했다고 한다면 62일, 한강 인근에서 출발했다고 가정하더라도 33여일이 소요된다. 물론 이는 당시의 행군로[* 신라의 교통로에 대해서는 서영일, 《신라 육상 교통로 연구》, 학연문화사, 1999 참조]나 보급 여건에 대해 전혀 고려하지 않은 단순한 수치로서, 실제로는 이보다 더 길어졌을 수도 있다. 즉, 최소 1~2달가량의 시간이 필요하므로, 3월에 압록강을 건너는 부대는 670년 1월경에는 주둔지를 출발했어야만 한다. 그렇다면 당연히 부대편성과 계획은 669년 말기에는 이루어졌을 것이다. 그렇다면 걸리는 부분은 신라 조정에서 설오유 부대 등을 의도적으로 겨울 [[혹한기]]에 이동시켰다는 이야기가 된다. 의도적으로 설오유 부대를 강행군시켰다면, 사전에 치밀하게 준비된 무언가가 있었을 것이다. 설오유 부대가 1월경에 출발했고, 3월에 압록강을 건넜으며, 4월에 교전을 치루었다면 작전 수행기간만 3개월 이상이 된다. 혹한기에 장거리 행군을 하고, 교전에서 승리를 했으며, 물러났을 시기에도 패배해서 물러난 것이 아니라 전략상 후퇴를 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 사실을 볼 때 설오유가 이끄는 신라군 1만 부대는 그 숫자는 비교적 적지만 신라에서 엄선한 정예군으로 사기가 높았으며, 분명 뚜렷한 부대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케우치 히로시 등은 20,000명이라는 적은 부대가 신라 본토에서 [[황해도]]와 [[평안도]]를 지나 [[압록강]]을 건너 요동 지역까지 침입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기 때문에, 여기서 나오는 압록강이 현재의 압록강이 아닌 대동강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노태돈은 이에 반발하였으며, 실제로 압록강이라고 명확히 기록된 것을''' '신라 주제에 [[요동]]까지 어떠케 감?''''이라는 식의 착오라고 볼 근거는 없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케우치 히로시가 2만을 적은 부대라고 했지만 사실 2만은 전근대 시대에 '''결코 적은 수가 아니다.''' 《삼국지연의》나 여러 소설 등의 영향 그리고 나당전쟁 50여년전 [[고구려-수 전쟁|수나라가 백만 대군으로 쳐들어간것]]으로 인한 영향으로 수십만, 100만 대군에 익숙해진 사람들이 2만을 적은 수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당시 세계적인 강대국인 당나라조차 중국 본토와 먼 곳에 원정을 보낼 때는 3만~5만명 선에서 병력을 맞춰 보낸 만큼[* 고구려에 수, 당이 보냈던 수십만에서 백만 단위의 군대는, 당시 세계에서 가장 행정과 체제가 발달하고 고도로 밀집화된 관료제를 가지고 있던, 그리고 인구가 세계의 과반을 넘던 중국조차 '''정말 온 나라를 쥐어짜내야 나오는 병력'''이었다.] 2만은 적은 수가 결코 아니다. 더군다나 설오유 부대의 작전이 매우 신속했던 것을 생각해보면 2만의 군세는 (후술하겠지만) 기병으로(또는 기병의 비율이 매우 높게) 편성됐을 가능성도 매우 높다. 기병, 보병 혼성 편제로 2만이어도 엄청난데 기병 전력만 2만이면 이는 적다는 언급조차 할 수 없는 엄청난 군세이다. 이에 대해 669년 9월, 대륙 반대편의 당나라 서쪽 [[토번]]이 강성해져서 한반도 주둔 당군이 토번 전역으로 철수했다는 견해도 있다. 하지만 당시의 사건은 토번이 당을 공격한 것이 아니라 토번이 [[토욕혼]]을 압박한 사례였고, 토번이 본격적으로 당을 압박한 것은 670년 4월이므로, [[안동도호부]]가 [[신성#s-5]]으로 옮긴 것과 병력 철수 등은 고구려 유민과 관련이 깊다고 노태돈은 주장하였다. 평양 주둔 당군이 고구려 유민 강제 이주에 동원됨에 따라 평양 일대에 대한 당의 지배력과 군사력은 일시적으로 크게 약화된 상태였다고 할 수 있다. 즉, 670년 3월 설오유와 고연무의 2만 군대가 평양 주변을 지나고 압록강을 넘어 당군과 충돌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평양 일대가 일시적으로 군사적 공백상태였기에 가능한 것이다. 해당 기사에서 언급되는 개돈양은 위치를 알기가 어렵고, 비정되고 있는 지역도 없다. 다만 [[오골성]] 주변이므로 압록강 이북 지역임은 틀림없을 것이다. 다만 皆敦壤이 아니라, '모두(皆) 돈양(敦壤)에 이르러 먼저 기다리고 있었다'라고 해야 한다는 견해가 있다. 만약 개돈양을 돈성, 즉 [[신성#s-5]]이라고 한다면, 설오유와 고연무 부대는 669년 신성으로 이동한 [[안동도호부]]를 목표로 이동한 것이 된다. 그런데 이들이 압록강 유역으로 진군했다면, 평양 부근에 있는 안동도호부 세력을 지나갔다는 것이 된다. 비록 안동도호부의 세력이 약화되었다고는 하나 이 시점에서 공터는 물론 아니다. 이 때 설오유 등이 취할 수 있는 루트는 크게 3가지다. * 첫째, [[황해]] 경기만에서 병선을 타고 압록강 하구로 가는 것인데, 가장 수월하긴 하나 당나라 수군에 발각되기 쉽다. 그리고 기록을 보면 이들은 육로를 이용했다. * 둘째, 동쪽 [[강원도]]와 [[함경도]]를 우회하는 일이다. 발각될 위험은 적으나 거리가 멀고 보급문제가 야기된다. 기습 공격을 하기 위한 시간상 선택하기 어렵다. * 셋째, 평양 주둔 당군을 직접 공격한 후, 평양을 경유하여 그대로 북상하는 것이다. 이는 거리상으로는 가장 빠르지만, 대규모 전투를 감수해야 하기 때문에 시간이 많이 소요된다. 그리고 요동 기습 공격을 하려는 의도라면 역시 어렵다. [[오골성]]과 [[평양성]]을 연결하는 구간은 [[안동도호부]]의 주요 간선도로로서, 고려시대에는 '''북계서로'''라고 불렀으며, [[여요전쟁]] 때는 [[거란]]군의 공격 루트이기도 했다. 고려시대 교통로가 통일신라의 교통로를 계승하면서 발전했다는 점을 생각해 볼 때, 설오유와 고연무의 연합군은 '''북계동로'''를 이용, 평양을 조금 우회하고 대규모 전투를 회피하면서 빠르게 북상해 나갔을 것으로 추정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