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나당연합군 (문단 편집) == 경과 == 일반적으로 나당 동맹에 대항해 고구려와 백제가 동맹관계(여제 동맹)였다고 알려져 있지만, 이는 백제가 멸망하기 일보 직전인 [[650년대]]에나 느슨하게 성립했을 뿐, 백제 역시 고구려와는 [[고국원왕]], [[개로왕]] 시절부터 수백여 년간 쭉 사이가 안 좋은 편이었고 그때문에 백제는 신라와 마찬가지로 꾸준히 중국을 우군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즉, 쉽게 말하자면 여제 동맹이란 안보를 같이하는 동맹이라기 보단 공공의 적인 신라를 우선적으로 조지자는 제휴 관계 정도로 보면 된다. 백제가 아닌 신라가 당나라와 손을 잡게 된 결정적 계기는 645년에 있었다. 당나라가 고구려를 침공했을 때 (제1차 [[고구려-당 전쟁]]) [[당태종]]은 백제와 신라에게 고구려의 후방을 공격할 원군을 요청했다. 신라는 이에 응해 고구려를 공격한 반면, 의자왕은 당나라의 요구를 무시하고, 대신 신라가 원정을 간 사이를 틈타 신라의 측면을 침공하여 전과를 올렸다. 이로써 백제는 당의 요청을 거부했을 뿐만 아니라 당을 도운 신라를 공격함으로써 당의 뒤통수를 친 셈이 된 것이다. 이에 격노한 당태종은 백제와의 외교 관계를 단절하고 죽을 때까지 백제의 사신을 받지 않았다. 당태종이 죽고 [[당고종]]이 즉위하자 의자왕은 당나라와의 관계 개선을 시도하기 위해 651년 당나라에 한 차례 사신을 보내 조공했다. 이때 당나라 조정에서는 백제로 귀국하려는 사신에게 국서를 보내 더 이상 신라를 공격하지 말 것과 그동안 빼앗아간 신라의 영토를 반환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때 백제는 대야성을 비롯한 지금의 경상도 서부를 상당히 점령한 상태였고 신라에 이를 순순히 돌려주는 것은 무리한 주장이었으므로 따를 수 없었다. 이후로 백제는 당과의 관계를 거의 단절하고 독자 노선을 걷기 시작하였다. 이듬해인 652년 정월에 당에 사신을 파견한 것을 마지막으로 더이상 의자왕은 당나라에 사신을 파견하지 않았다. 그 대신 당과 적대적인 고구려에 좀 더 가까워졌는데 알다시피 당과 고구려는 전면전쟁을 여러 번 벌인 적대관계. 백제가 고구려를 가까이 하면서 당과는 완전하게 척을 진 형태가 되었다. 반면 신라의 경우는 645년에 원군을 파견해 당나라를 도울 수 있다는 제스처를 취했고, 648년, 후에 [[태종 무열왕]]이 되는 김춘추를 당에 파견하여[* 앞서 김춘추는 고구려와 일본에 각각 한 번씩 직접 건너가 화의를 요청했으나 결렬되어 아무 소득 없이 돌아왔다. 고구려와 매년 싸웠음에도 고구려를 찾아간 이유는 연개소문이 반란으로 신생정권을 세웠기 때문에 그쪽으로 희망을 걸고 갔으나 포로 신세로 지내다가 돌아왔다.] 신라와 당의 이해관계가 일치함을 확인하고, 이어 649년 [[당고종]]이 즉위하면서 백제에 신라의 성을 돌려줄 것을 요구함과 동시에 신라를 공격할 경우 당이 개입할 것이라는 것을 천명하였으며, 왜에도 신라 지원을 요구하는 등 650년부터 본격적으로 나당동맹이 표명되었다. 660년, 당의 [[소정방]]과 신라의 [[김유신]]이 백제를 협공하여 백제의 수도인 [[사비성]]을 함락시키고, 백제를 열흘만에 멸망시켰다. 짧은 시간에 멸망을 당한 이유는 백제는 당시 당나라가 이런 식으로 쳐들어온다는 예상을 하지 못했고 그에 따라 서해안 방비가 부실했기 때문이다. 그 당시의 항해술로는 고구려 앞바다를 거쳐서 와야 정상이지 10만이 넘는 대함대가 [[황해]] 먼바다를 바로 넘어올 것이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그렇게 바다에서 13만 당나라 수군이 넘어와 백제의 뒷통수를 때리면서 백제는 쉽게 멸망했다. 668년, 당의 [[이세적]]과 신라의 [[김인문(신라)|김인문]]이 고구려를 공격하여 고구려의 수도인 평양성을 함락시키고, 고구려를 멸망시켰다. 고구려가 승리를 거둔 과거 1, 2차 여당전쟁 때와는 달리 이번에는 고구려에서 내분이 일어나 대막리지 [[연남생]]이 고구려의 심장부나 다름없는 국내성 일대를 당나라에 그대로 가져다 바친 상태에서 당나라가 50만 대군을 동원하여 대대적인 침공을 해 왔다. 압도적인 전력 차이였음에도 고구려는 2년에 걸쳐 끝까지 저항했지만 결국 668년 말, 수도 평양성이 함락당하고 고구려는 멸망한다. 신라군은 고구려 남부 방어선을 뚫고 북진하여 당군을 도와 평양성 함락을 거든다. 백제와 고구려가 멸망한 이후 나당연합군은 더이상 유지할 수 없게 된다. 분열의 발단은 당이 [[평양]] 이남을 신라에게 주기로 한 약속을 저버리고 한반도 전체에 대한 지배 야욕을 드러낸 것에서 시작되었다. 당은 평양에 [[안동도호부]], 공주에 [[웅진도독부]]를 두고 경주에는 [[계림대도독부]]를 두어 신라의 [[문무왕]]을 계림 도독으로 삼았는데, 물론 당나라는 신라 고유 영역까지는 직접 지배하지 못했으므로 계림도독부는 이름만 존재하는 허울뿐인 통치조직이긴 했지만 이는 명백히 고구려와 백제는 물론 신라까지 당의 지배 하에 두겠다는 당나라의 의도를 나타낸 것이다. 신라는 당의 야욕을 더는 참지 않았고 이에 대응하여 [[고구려부흥운동]]을 몰래 후원하며 당을 견제하는 한편 당과 직접적으로 대결함으로써 연합군은 와해되고 7년간의 [[나당전쟁]]이 일어난다. 이후 나당전쟁에서 당나라가 패배해 한반도 일대에서 세력을 물리고 신라는 한반도 전체를 다스리게 된다. 사실 신라는 당과의 전쟁을 예상하고, 고구려가 멸망하기 한 달 전에 왜에 사신을 보내어, 왜와 중립적 우호관계를 만들어 후방을 안전하게 만들려는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당나라와 전쟁 중에도 당에 사신을 보내어 "살려만 주세요" 또는 "우린 아직 외교적으로 해결할 수 있어" 라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는 문무왕이 보여주었던 [[화전양면전술]]의 일환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같은 시기 토번의 난으로 서북 지방에서 골머리를 앓던 당나라가 신라와의 대결에 군사력을 집중할 수 없었던 탓도 컸겠지만 신라 역시 전투 경험이 풍부한 군사를 최소 몇만 단위로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홈그라운드 이점을 잘 살린다면 충분히 당군을 막아낼 정도의 여력이 있었기 때문. [[문무왕]]은 이런 당나라의 처지를 이용하여 전쟁의 판도가 불리해지면 항복하는 척하고, 다시 전세가 뒤집히면 강공으로 나서는 식으로 당나라의 복장을 뒤집어놨다.] 그렇게 나당동맹은 깨졌지만 나당전쟁 이후 [[발해]]가 발흥하며 각국의 영토가 대강 정해지고 서쪽에서 [[토번]]이 세를 떨치자 한반도까지 신경쓸 수 없게 된 당은 [[성덕왕]] 대부터 다시 신라와의 우호적인 관계를 회복한다. 신라는 당의 최우방국으로 취급받았고 각지에 [[신라방]]이라는 거주지역이 만들어졌다. [각주] [[분류:수당시대]][[분류:신라]][[분류: 한중관계]]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