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희애 (문단 편집) === 1983년 ~ 2000년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김희애(2).jpg|width=100%]]}}}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0.0011.jpg|width=100%]]}}} || [[제주특별자치도|제주도]]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서울특별시|서울]]로 이사를 와서 자랐으며, 혜화여고 1학년인 1982년 제일모직 의류 CM 모델로 연예계 활동을 시작했고[* 그 때 첫 출연료로 당시 꽤나 큰 돈이었던 15만원을 받았다고 알려졌다.] 1년 뒤인 1983년 영화 《스무해 첫째날》로 데뷔했다. 1985년에는 당시 하이틴 스타였던 [[손창민]]과 함께《내사랑 짱구》의 '짱구' 역할로 출연하여 본격적인 배우 활동을 시작했다. 10대 시절에 하이틴 영화에서 주로 활동하다가 1985년 MBC 베스트셀러 극장 "알 수 없는 일들"로 브라운관에 데뷔했고, 이후로는 TV 쪽에 주력했다. 그 해에 중앙대학교 연극영화과에 진학[* 김희애는 67년 4월 출생이지만 66년생 말띠와 같이 학교를 다녔으며, 동기가 [[박중훈]]•[[전인화]]•[[조용원(배우)|조용원]] 등이다. 여기서 [[박중훈]], [[전인화]]는 1년 재수하였다.]하여 학업과 연기를 병행하였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여심 김희애(1).gif|width=100%]]}}} || || {{{#fff '''《여심》 송다영 役'''}}} || 1986년 200 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여심》의 주인공으로 캐스팅되었다. 당시 스무살 신인임에도 불구하고 10대부터 60대를 소화하는 연기를 보여주며 KBS의 신세대 스타로 급부상한다.[* 실제로 [[조용원(배우)|조용원]], [[전인화]]와 함께 중앙대 연영과 트로이카로 불려졌었다.(동기인 [[박중훈]], [[변우민]]과 함께 전설의 85학번으로 불리기도 한다.)] 1987년에는 전영록이 작사/작곡한 '나를 잊지 말아요'를 부르기도 했다.[* 의외로 순위에 들어가기도 했던 유명한 곡이다.][* [[https://youtu.be/9xOuAEHGRVw?t=1049|사실은, 전영록이 1976년 10월에 현역 입대 후 휴가기간에 틈틈히 녹음했던 곡을 모아 군복무 도중에 발매된 앨범에 수록한 '''잊지 말아요'''가 원곡이다.]]] 시간이 흘러 2014년 김희애는 《힐링캠프》에서 '나를 잊지 말아요'를 다시 부르기도 했다.[[https://youtu.be/Cu4Tqj4iOmE|영상]] 1985년 대학교 1학년 시절 KBS에서 특채 탤런트로 데뷔하고, 몇년간 KBS TV와 라디오에서 맹활약했으나[* 1987년 황신혜와 공동주연한 인기 주말연속극 '애정의 조건' 및 인기 일일연속극 '어머니' 등에 출연/1986년 말부터 김미숙의 뒤를 이어 라디오 프로그램 'FM인기가요' DJ로 활동], [[1990년 KBS 사태]][* KBS 사태 후 김희애뿐만 아니라 전인화, [[김미숙(배우)|김미숙]], [[김영철(배우)|김영철]], [[조민수(배우)|조민수]], [[최재성(배우)|최재성]] 등의 인기 배우들이 MBC 등 다른 방송사로 자리를 옮겨야 했으며 [[김혜수]], [[이미연(배우)|이미연]], [[손창민]], [[하희라]] 등 대학-대학원 학생 연기자는 학점 만회에 전념해 왔다.]가 터지면서 [[MBC]]로 이적해 1990년대에 MBC의 간판 배우로 활동했는데, 1990년 황인뢰 PD의 드라마인 《[[여자는 무엇으로 사는가]]》에서 주연을 맡고 연기파 배우로 이름을 얻기 시작했다. 사실은, 2년 전인 1988년에 MBC 주말연속극 《[[내일 잊으리]]》[* 인기작가 박정란 극본]에 이미 주연으로 출연하는 등 KBS 탤런트였음에도 MBC TV에서도 가끔 얼굴을 비추다가 90년을 기점으로 완전히 MBC와 전속계약을 맺으며 하희라•채시라 등과 MBC의 간판 탤런트로 활동한 것이다. 특히 88~89년에 방영된 주말극 《내일 잊으리》는 KBS 주말극을 압도하는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고[* 같이 출연한 이휘향은 주부 탤런트였음에도 세련된 사업가 역으로 인기를 얻었다.], 이와 더불어 89년 말엔 코믹홈드라마 《[[당신의 축배]]》의 주연을 맡아 그 해 MBC 연기대상에서 당대의 톱스타 [[원미경]]과 대상 후보로 선정돼 그녀는 여자 최우수상을 수상했다. 이후 [[강석우]]와 연애결혼 케미와 연기변신을 보여준 MBC 주말드라마 《[[산 너머 저쪽]]》,[* 이 드라마로 당시 여명의 눈동자나 사랑이 뭐길래 등 인기극들의 주연들을 물리치고 MBC 연기대상의 대상을 수상하였다. 두 드라마는 최고의 시청률을 기록하고 있었으나 비교적 연말부터 방영됐기 때문에 6개월간 주말극을 이끌며 연기변신을 시도한 그녀가 대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이 때 당시 김희애의 나이는 24살로 2010년까지 MBC 연기대상 최연소 대상 보유자의 기록을 가지고 있었다.] 비운의 연기자 고 [[변영훈]]과 함께한 《[[분노의 왕국]]》을 거쳐,[* 당시 일본 천황이었던 [[아키히토]] 천황 부처가 행차 중에 저격하는 장면 때문에 일본이 뒤집혀진 일이 있었을 정도로 파란을 일으킨 드라마였다.] 1992년,《[[아들과 딸]]》을 만나게 된다. 《[[아들과 딸]]》은 역대 드라마 시청률 순위 7위를 차지한 드라마로 독립적이면서도 역경을 헤쳐나가는 '이후남' 역을 맡아 큰 사랑을 받았다. '후남'을 통해 당시 한국 드라마에 없던 새로운 여성상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갖는다. '후남'은 남아선호사상이 강한 부모에게 키워졌지만 스스로 운명을 개척해 나간 여성이며 김희애는 강인한 이미지 뿐만 아니라 여성스러움도 표현하며 매력적인 캐릭터를 만들었다. '후남의 아버지'역의 [[백일섭]]은 2016년, 팬이었던 연기자로 [[김희애]]를 꼽으며 "현존해있는 여배우 중 [[김희애]]만큼 잘하는 배우도 없다. 신인 때부터 장차 스타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며 말했다.[[https://n.news.naver.com/entertain/article/117/0002901554|기사]] 《아들과 딸》이후 최고의 연기력이라 인정받는 한편, [[최진실]], [[채시라]]와 함께 1990년대 TV 트로이카[* 셋 모두 MBC 브랜드를 주도했다.]를 형성하는 여배우들 중 하나로 꼽히게 된다. 1993년, 최진실과 투톱을 주인공으로 출연한 《[[폭풍의 계절]]》에서 훌륭한 연기력으로 호평받았다. 이로써 [[MBC]]에서 한 해 두 편의 히트작을 연속으로 배출하며 그 해 '''MBC 방송대상, 백상예술대상 대상'''을 수상했다. 이듬해엔 [[MBC]] 창사특집 드라마《[[까레이스키]]》에서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된 '성남영' 역을 연기했다. 이 드라마가 반 사전제작이었기에 장기 해외 촬영으로 인해 1년 여간을 묶여있었는데, 당시 신드롬이었던 [[모래시계(드라마)|모래시계]]와 맞붙어 5% 안팎이라는 초라한 성적을 받았다. 까레이스키의 실패로 침체된 상태에서 《[[사랑과 결혼]]》과 황인뢰 PD와 재회한 옴니버스 미니시리즈 《[[연애의 기초]]》를 출연했다. 주말극 《[[사랑과 결혼]]》 역시 부진한 성적을 거두며 95년 당시 언론으로부터 '김희애 저조'라는 평가를 받았으나 연말에 방영된 《[[연애의 기초]]》는 비교적 준수한 시청률을 기록했고, 4명의 주연들 중 김희애는 그녀만의 개성적인 연기로 가장 눈에 띄며 다시 자신의 존재를 대중에게 알렸다. 이 드라마 덕분에 그동안의 저조한 성적에도 연말 MBC 연기대상에서 대상후보로 선정됐고 이듬해 방송 3사 PD들이 모여 뽑는 한국방송프로듀서상에서 탤런트상을 수상했다. 1996년 '한글과 컴퓨터'의 창립자인 [[이찬진]]과 [[결혼]] 했는데 당시 잘나가는 벤처기업인과 톱여배우가 만난다고 하여 큰 화제를 모았다. [[https://youtu.be/EK-aRTHSKlM|영상]][* 갑자기 결혼기사가 나서 해외여행을 하고 있던 이찬진의 시부모님이 급히 귀국을 한 후 기자회견을 했다고 한다. 기자회견 후 상견례를 했다는 일화도 있다.] 슬하에 이기현(1998년 9월생), 이기훈(2000년 1월생) 형제를 출산했다. 그 사이 96년 MBC 한국가요대제전 MC 등으로 얼굴을 내비쳤고, 교수로 재직한다는 소식을 전하며 화제가 됐다. 99년엔 MBC 일일연속극으로 브라운관에 복귀했으나 동시간대 방영한 KBS 일일극에 밀리는 성적이었고, 그 시기에 둘째를 임신하게 되어 잠깐 얼굴에 비친 정도가 됐으며 전성기 때 같이 활동한 또래 연기자들은 여전히 왕성한 활동을 하며 인기를 누렸지만, 주부가 된 김희애의 시대는 이대로 저무는 듯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