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활란 (문단 편집) === 래디컬 페미니스트들의 변호 === 김활란 본인은 래디컬 계열은 아니었지만 정작 옹호 세력들은 '''[[래디컬 페미니스트]] 세력(!)'''이다. 래디컬 페미니스트들의 주장에 따르면 '''아무튼 민족주의 때문에 단순하게 평가받거나 폄훼받는다'''는 주장이다. >본 연구는 현재 __ 한국 사회에서 ‘친일 청산’이 제기되는 방식과 시각을 '''여성주의 입장에서 문제 제기'''__하고, __식민지 '''여성 지식인의 저항과 주체성'''을 새롭게 논하고자__ 하였다. 이는 __‘친일’ 청산론이 한국 사회의 구성원이 가지는 다양한 정체성을 ‘'''민족'''’이라는 단일하고 위계적인 담론 속으로 수렴하면서,''' ‘여성’으로서의 정체성은 사소하고 부차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__는 비판에서 출발하였다. 이러한 담론 지형 속에서__''' ‘민족’의 경험은 본질적인 것이 되고, ‘여성’들의 경험은 질문되지 않는다'''__. 따라서 __여성들은 ‘친일’에 연루된 여성들을 설명할 대안적 틀이 없으므로, 다시 ‘민족’의 눈으로 역사 속의 여성들을 바라보고, 자신의 정체성을 반복하여 '''민족'''에 부착시키는 결과를 가져온다__. 이에 본 연구는 ‘여성’의 눈으로 식민지 조선을 문제화하려는 시도로서, 김활란과 [[박인덕]]을 중심으로 두 여성의 삶을 가로지르는 기독교, 근대, '''민족''', 여성, 교육의 의미를 해체하고 맥락화하려고 시도하였다. >연구의 결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김활란과 박인덕의 근대 교육 경험은 조선의 이교도 여성에게 기독교적 삶을 전파하고자 했던 서구의 여성 선교사, [[기독교]]를 통해 '''민족'''의 근대화를 추진하려고 했던 기독교 '''민족주의''' 세력들이 개입하는 장이었다. 김활란과 박인덕의 정체성의 기반을 이루는 기독교는 여성들에게 도덕과 규율이라는 근대적 통제의 내면화를 통해 자신이 속한 공동체에 봉사하고 헌신하는 여성 주체가 되기를 요구하는 한편, 자기 표현과 주장의 기회를 제공하고, 근대적 시민의 자질을 훈련시키는 근대 교육 기관이었다. 이는 또한 근본주의적 서구 헤게모니와 현실 개혁적 사회 복음주의 담론이 경합하면서 이원론적 신앙의 자세를 갖게 하는 모순적인 것이었다. 이러한 경험은 식민주의의 억압과 더불어 조선 여성이 서구, 일본, 민족, 근대에 대해 복잡한 지형에 위치하게 한다. >둘째, 김활란과 박인덕에게 어머니의 삶은 기독교가 [[가부장적]] 조선 사회에서 여성을 해방시킨 전형이 되며, 어머니들은 다시 딸들에게 기독교를 통해 가부장적 사회를 뛰어넘는 힘을 제공함으로써, 이들에게 기독교는 근대적 삶을 추진하는 강력한 힘으로 자리잡게 된다. 김활란과 박인덕은 자신의 삶에 개입한 갈등하는 사회적 담론들을 신앙 체험을 통해 연결하는데, 여성으로서의 삶의 경험 속에서 적극적으로 자기 정체성을 구성하는 과정에서 종교적 체험이 나타난 것이었다. >셋째, 식민지 여성 지식인의 위치는 가부장제, 식민주의, 서구 세력과 다층적으로 협상을 하면서 공간을 확보해야 하는 것이었다. 이들은 가부장적 기독교 지식인 사회에서 끊임없이 ‘여성’으로 의미화되었으며, 가부장적 여성성을 위반하지 않고, 계몽주의적 기획에 협력하는 범위에서만 지식인 공동체에서 성원권을 보장받을 수 있었다. 또한 일본적인 주류 문화 속에서 미국으로부터 지식을 전수받은 이들은 주변적인 존재였고, 미국은 이들에게 저항의 대상임과 동시에 연대의 대상이었다. 가부장적 식민지적 주변성으로 인해 김활란과 박인덕의 위치는 불안하고 위험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기독교 여성 공동체와 미국 기독교 단체의 지원과 남성 지식인들과의 연합과 제휴를 통해, 자신들의 지위와 공동체의 이익을 협상해 나갔다. >넷째, 김활란과 박인덕은 1930년대 조선 사회의 현실에서 여성의 지위 향상과 자립 가능성에 부심하였다. 김활란이 현실을 인정한 바탕에서 여성의 지위 향상을 모색했다면, 박인덕은 여성의 경제적 주체를 주장하고 사회의 지원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당시 기독교 민족주의가 주력한 사회 운동이었던 농촌 운동에 참여하였는데, 박인덕은 농촌 여성에게 궁극적으로 직업 능력을 길러주기를 바랐고, 김활란은 농촌 전반을 문명화시키는 데 중점을 두었다. 그러나 정신과 지식을 통해 개인을 근대적 주체로 변화시키고자 하는 방법은 동일했으며, 여성 지식인으로서 이들은 농촌 여성들이 사회적 각성을 통해 전통적 가부장적 성별 관계를 극복하기를 도모했다. >다섯째, __김활란과 박인덕에게 일제 협력은 전향의 결과라기보다는 변화하는 사회 지형에 대한 다면적인 저항과 협상의 과정이었다. 이들은 서구의 제국주의와 서구 여성과의 연대 사이에서 갈등하고, 가부장적 남성 지식인 사회로부터 주변화된 위치에 있었다. 재조선 일본 여성의 식민주의적 조선 개혁 운동과 제휴하면서 이들은 자신의 주장을 개입시키고, 사회적 공간을 확보하면서, 여성 교육을 협상해 나갔다.__ >---- >김활란과 박인덕을 중심으로 본 일제 시대 기독교 여성 지식인의 '친일적' 맥락 연구 [[http://www.riss.kr/search/detail/DetailView.do?p_mat_type=be54d9b8bc7cdb09&control_no=2888ccbeb860b85cffe0bdc3ef48d419#redirect|#]] >본 연구는 __'''민족주의'''를 기준으로 김활란의 일제 협력 행위를 평가해 왔던 기존 담론에 대한 '''여성주의적 문제제기''' 중 하나이다__. 본 연구에서는 그가 식민지 시기의 지식인 '여성'이었다는 점과 그에게 '성별화된 협력의 논리'가 있었다는 점에 주목하여 일제 협력 배경과 그 과정에서 구성한 내적 논리를 밝혔다. >1937년부터 시작된 김활란의 일제 협력은 식민지 조선 사회에서 기독교계 인사들을 제외하고는 지원 세력이 거의 없었던 그의 현실에서 기인하였다. 그리고 그는 여성의 사회진출을 내세웠던 일제의 전쟁 동원 논리에 일말의 희망을 걸고 일제에 협력하였다. 그러나 1940년대 전쟁 말기로 접어들면서 그의 이러한 희망은 실현불가능한 것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전쟁협력을 멈추지 못하였던 김활란은 자기모순의 고통을 경험하게 되었다. >---- >일제 말기 김활란의 일제 협력 배경과 논리 [[http://www.riss.kr/search/detail/DetailView.do?p_mat_type=1a0202e37d52c72d&control_no=89ecab90231fa6efffe0bdc3ef48d419#redirect|#]] >한국이 일본 식민통치로부터 해방된 지 거의 70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친일협력은 한국에서 여전히 중요한 문제이다. 친일협력 문제를 청산하려 한 그간의 시도들은 친일협력 혐의자들로 하여금 반역적인 행위을 하게끔 한 환경과 그러한 선택을 낳은 의도와 같은 회색지대가 있다는 사실을 고려하지 않고, “친일협력자”의 반역 행위에만 주목하는 경향이 있다. “신여성”이자 교육자인 김활란은 여성교육을 중요하게 생각하였다. 그러나 자신의 목표를 달성하려는 그녀의 노력들은 후대에 친일협력자로써의 악명을 낳게 한 행동으로 이어졌다. __한국의 '''민족주의''' 역사학은 “친일협력자”를 반역자 또는 애국자의 양극단으로 범주화하는 경향이 있다__. 그러나 친일협력자의 생애를 보다 상세히 관찰한다면, 우리는 대부분의 협력행위들이 보다 분명한 반역죄와 단순한 협력 사이의 회색지대에 있음을 알 수 있다. 김활란의 생애는__ '''민족주의''' 역사학으로는 친일협력 문제를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것__, 그리고 이와 같은 회색지대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필자는 그녀의 삶을 통하여 “협력자”의 행위 주변에 있는 회색지대를 주목함으로써 친일협력 문제의 복합성을 드러내고자 한다. 이를 통하여, __'''민족주의''' 역사학이 친일협력 문제를 과도하게 단순화한 것에 도전하면서, 보다 미묘한 이해를 제시할 수 있기를 바란다__. >---- >신여성 그리고 친일협력자로써의 김활란 : 일본 식민통치 하의 조선인 친일협력에 대한 포괄적 이해를 위하여[[http://www.riss.kr/search/detail/DetailView.do?p_mat_type=1a0202e37d52c72d&control_no=6b957836fec550c4b7998d826d417196#redirect|#]] 보면 다 [[래디컬 페미니즘]] 담론이거나 래디컬 페미니즘 세대(1990년대~2010년대 후반인 현재)에서 제기 된 담론들이다.[* 『급진주의 페미니스트들은 "개인적인 것은 정치적"이고 __여자들 모두가 "자매"__라고 선포했다. 그들은 남자들이 여자들의 성생활과 출산 행위 그리고 __여자들의 자아정체성, 자존심, 자부심을 모두 다 지배하는 것이 인간이 서로에게 행하는 모든 억압행위 중에서 가장 근본적__이라고 주장했다.』 로즈 마리 통, 『21세기 페미니즘 사상』, 한신문화사 2010, 68;][* 『급진적 여성주의 이론은 여성들이 공유할 수 있는 경험으로 여성의 몸을 통한 여성성에 대한 것이고 __과거 남성 중심적 시각에 부정적인 것으로 인식되던 것을 찬양__하고 여성적인 힘의 원천으로 의식을 바꾸어 놓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일상의 여성학 - 여성의 눈으로 세상읽기, 박영사, 2017, 22쪽] 김활란 본인은 [[자유주의 페미니즘]]이나 기독교를 기반으로 한 보수주의 페미니즘으로 분류되나, 정작 일제의 침략전쟁에 참여했던 죄악은 정작 [[자유주의 페미니즘]]이나 자신이 세운 [[YWCA]]이나 [[한국여성단체협의회]]등이 속한 보수주의 페미니즘[* 실제로 소현숙이 쓴 "교육계 여성들의 '일제 협력에 대한 기억과 망각 담론"를 보면 한국여협 산하 단체들도 여협 탄생 40주년을 기념해서 김활란을 기리기 위하여 만든 김활란 여성지도자상에 반대하였다고 나왔다. 그런데 래디컬 페미니즘 계열은 그러지도 않고, 김활란의 친일 매국 행위를 옹호하고 있는 것이다.]에서조차도 변호받지 못 하고 오히려 래디컬 페미니즘 담론에서 변호를 받고 있다.(…) 물론 페미니즘 시각으로 김활란을 비판하는 페미니스트들도 존재한다. 그러나… >민족주의적 비판론과 페미니즘적 옹호론은 결국 각자의 입장에 적합한 일면적 측면만을 강조함(…) 페미니즘 입장에서 김활란에 대한 평가가 단순히 옹호론으로만 귀결되었던 것은 아니다. (…) 논쟁의 과정에서 '''주도권을 쥐지는 못하였다.''' >---- >소현숙, 교육계 여성들의 '일제 협력'에 대한 기억과 망각, 수행인문학 제 36집, 214 하지만 그들은 주류 페미니스트들이 아니였다. 사실 저 수필이 나온 1990년대 중반엔 이미 래디컬 페미니즘이 이미 다수였기 때문에(= 자유주의,보수주의 페미니즘은 비주류로 전락했기에) 전혀 이상한 일은 아니다. 심지어 민족주의 계열에서도 이전에는 '''살인자인 [[권희로]]를 옹호해서''' 논란이 된 적도 있지만 2010년 전후에 들어서 일제강점기 한민족 중에도 민족반역자가 아니라도 가해자 일수도 있다는 점이 학계에서 진지하게 연구되고 있고[* 대표적인 연구가 [[일제강점기 화교배척폭동]]이다. 본 문서를 보면 관련 논문이 상당하다는 점을 알 수 있다.], 한국 기독교계에서도 신사 참배나 독재정부와의 유착에 대하여 참회를 하는 등 자신들의 행위에 대하여 반성을 하는 모습을 보이는 데도 불구하고, 정작 한국의 래디컬 페미니스트들은 앞의 둘을 탓하며 김활란을 변호하고 있는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