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활란 (문단 편집) == 생애 == 1899년 2월 27일에 [[인천광역시|인천]]에서 태어났다. 아호는 우월(又月)로 기해년에 태어났다 하여 어렸을 적 [[이름]]은 '김기득(金己得)'이었다. [[개신교]] 신앙이 깊었던 어머니의 영향으로 7세 때 가족 전체가 [[세례]]를 받았고 '헬렌'이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이에 대한 일화가 있는데 사실 '헬렌'이라는 세례명은 김기득의 어머니가 전도받은 선교사의 이름이라고 한다. 그런데 세례를 주는 선교사가 잘못 알아듣고 김기득에게 '헬렌'이라는 세례명을 주고 김기득의 어머니에게는 '또라'라는 세례명을 주었다는 설이 있는데 '또라'는 아마도 '테오도라'(Theodora)의 약칭으로 보인다. 역시 현대식 [[외래어]] 표기법대로라면 '도라'가 되어야 하는데 아마 김활란처럼 이름으로 [[개명]]하면서 [[한자]]식으로 변환하여 어머니 이름이 '도라'로 나온 것으로 보인다.] 학교에 입학하면서 '헬렌'이라는 세례명을 한자식으로 고쳐 '활란'이라 했다. 그래서 이름이 '김활란'이 되었다.[* 현재 [[개신교]]는 [[성공회]] 외에는 세례명을 쓰지 않지만 당시에는 [[감리회]]에서도 현지화된 세례명을 주었다는 기록이 있으며 당시에는 [[교파]]와 무관하게 필명이나 호처럼 세례명을 붙이는 경우가 많았다.] 1907년 인천 영화학당에 입학했다가 1908년 미국인 선교사 메리 스크랜튼 부인이 세운 [[한국]] 최초의 여학교인 이화학당 고등과로 옮겼으며 이때 [[유관순]] 열사가 [[후배]]였다고 한다. 1918년 3월 이화학당을 졸업했다. 1922년 조선 감리회 감독이었던 웰치 선교사의 추천을 받아 미국 [[오하이오 웨슬리언 대학교]]에 입학해 [[철학]], 교육학, 웅변학 등을 공부하고 1925년 6월에 학사를 받았다. 1925년 10월 [[보스턴 대학교]] [[대학원]] 철학과에 입학해 1926년 봄에 [[석사]] 학위를 받았다. 1930년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컬럼비아 대학교]] 대학원에 입학하고 1931년 10월 '[[조선]]의 부흥을 위한 [[농촌]] 계몽'이라는 [[논문]]으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28년 덴마크 [[여행]]을 다녀온 후에는 "[[덴마크]]의 방법을 우리 실정에 맞게 고쳐 농촌 [[계몽]]을 하자는 내용의 '정말인'의 [[경제]] 부흥론"이라는 논문을 써서 1931년 6월에 발표했다. 미국 [[유학]] 전인 1918년 3월 이화학당 졸업 직후부터 이화학당 보통과의 [[교사]]로 활동했다. 1919년 이화학당 교사로 재직하던 중 [[3.1 운동]]이 일어나자 비밀 결사에 참여했다. [[찬송가]] 345장(개역 개정 기준, 통합찬송가 461장) "캄캄한 밤 사나운 바람 불 때[* 원제 : 풍랑서 구하심[br]심지어 이 찬송가는 '조선 백성들에게 위안과 희망을 심어줄 우려가 있다'며 [[일본 제국|일제]]에 의해 금지된 곡이었다.]"가 3.1 운동 직후 그녀가 작사한 것이다. 1920년 6월 '이화 전도대'를 결성해 [[전국]] 각지를 돌며 농촌 계몽과 복음 전도 활동을 했다. 1922년 4월 [[중국]] [[베이징]]에서 개최된 세계기독교청년연합회에 [[김필례]]와 함께 조선 여성 대표로 참석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1923년 3월 김필례, [[유각경]] 등과 함께 조선여자기독교청년회연합회([[YWCA]])를 창설했다. 이후 귀국해 이화여자전문학교의 교수 겸 학감을 맡아 1930년 6월까지 재직했다. 1926년 4월 26일 조선의 마지막 [[국왕]]인 [[순종황제]](융희)가 [[사망]]하자 [[조선총독부]]에서 만세 운동이 일어나는 것을 막기 위해 단체로 모여서 망곡(望哭)하는 것을 금지하였는데 이화학당 학감으로 재직 중이던 김활란은 미국인 선교사 출신인 이화여자전문학교 교장과 부교장에게 양해를 구하고 이화학당의 전체 학생에게 깃광목으로 상복을 입히고 [[창덕궁]] 앞에서 망곡을 하게 하였는데 주모자로 잡혀서 [[서울종로경찰서|종로경찰서]]의 [[감옥]]에 갇혔다. 1927년 1월 전문직 여성들의 친목 모임인 '망월 구락부'가 '직업 부인회'로 개편될 때 실행 위원에 선정되었다. 1927년 4월 [[유영준]], [[유각경]], [[최은희]], [[황신덕]], [[주세죽]][* [[박헌영]]의 부인이자 [[조선공산당]]에 참여했던 여성 [[공산주의]] 운동가.] 등과 함께 [[근우회]] 창립 준비 위원을 맡았고 5월 근우회 창립 때 회장에 선출되었다. 이 시기 김활란은 계몽 운동과 [[인권]] 운동에 힘쓴 동시에 오히려 [[독립운동]]에 가까운 행보를 보였다. 1932년 9월부터 1939년 8월까지 이화여자전문학교 교사로서 학감 및 부교장을 지냈으며 재직 중이던 1935년 11월 잠시 교장 대리를 맡았다. 이 무렵 농촌 교육을 통한 [[문맹]] 퇴치와 계몽 활동에 주력하는 한편 개신교 단체 활동도 활발히 전개했다. 1939년에는 한국인 최초로 이화여자전문학교 제7대 교장이 되었고 1942년에 사위 [[조석봉]] 등과 함께 동구여학교를 세웠다. 여기까지만 했으면 [[독립운동가]] 수준의 대접을 받고도 남았을 것이다.[* 대한민국 근대 교육의 [[선구자]]였는데다 [[조선시대]] 중반 이후에는 소외된 여성에 대한 교육을 시행했기 때문이다. 이화여자대학교에서 동상 철거 시위도 안 벌어졌을 것이다.] 1936년 이후부터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변절]]했는데 '아마기 가츠란'[* 외래어 표기 제정 통일 이후 기준으로는 '아마기 카츠란'이 되며, 창씨개명한 이름으로서의 리다이렉트는 표준어 우선 원리에 따라 카츠란 쪽으로 되어 있다.]이라는 이름으로 창씨개명을 한 것은 물론이고 1936년 말부터 갑자기 교육과 여성 계몽 분야에서 [[친일]] 활동에 적극적으로 앞장서기 시작했다. 조선총독부 관제 단체에는 거의 다 참석했고 매일신보에 정신대 참여를 적극 독려하는 글을 수백 편 쓰는가 하면[* 더욱 충격적인 사실은 자신이 졸업한 이화여자전문학교(졸업 당시에는 이화학당 대학부) 학생들에게도 정신대 참여를 독려한 것이다.] 내선일체 찬양글도 많이 썼다. 1938년의 [[윤치호]] 일기를 보면 윤치호가 도산 [[안창호]] 선생의 [[석방]]을 위해 애쓰는 것에 대해서 김활란이 분노했다는 대목이 있는데 이것만 봐도 김활란의 변절이 얼마나 철저했는지 짐작이 간다. 당시 김활란과 함께 친일 반민족 행위에 앞장섰던 여성계 [[지도자]]들이 [[박마리아]][* [[자유당]] 부통령 [[이기붕]]의 아내다. 여성 독립운동가 [[김마리아(1891)|김마리아]]랑 혼동하는 일은 없도록 하자.], [[모윤숙]], [[노천명]] 등이다.[* [[임영신]]도 1941년 조선임전보국단 창립에 참여했던 행적으로 보아 친일 의혹이 있었으나, 이름만 걸었을 뿐 창씨개명 거부 등으로 일제에 항거한 행적으로 보아 친일 부역과는 거리가 먼 모습을 보여왔다. 심지어 [[임영신]]의 경우 자신의 라이벌인 김활란을 깔 때 남들앞에서 김활란은 '''친일파'''라고 깠을 정도니 적어도 [[임영신]]은 이 문제에선 거의 자유로웠던 셈. 또한 친구였던 [[나혜석]]은 이걸 거부했다.] ||"동아 10억의 민족을 해방하고 광명으로 인도하려는 도의의 전쟁이다. 우리 총후의 반도 여성은 지금 이 도의 전쟁에 한 사람의 투사로서 가담하고 있다는 광영(光榮)을 가졌다." 1942년 12월 - 징병제와 반도 여성의 각오|| >'''황국 여성으로서 사명을 완수''' > >아세아 10억 민중의 운명을 결정할 중대한 결전이 바야흐로 최고조에 달한 이때 어찌 여성인들 잠자코 구경만 할 수가 있겠습니까....(중략)...싸움이란 반드시 제일선에서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 학교가 앞으로 여자 특별 연성소 지도원 양성 기관으로 새로운 출발을 하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인 동시에 생도들도 황국 여성으로서 다시없는 특전이라고 감격하고 있습니다. > >김활란,「매일신보」(1943.12.25) [[8.15 광복]] 후 1945년 9월 [[미군정]]청 한국교육위원회 위원에 임명되었으며 1945년 10월 이화여자전문학교를 복구하여 교장을 맡았다. 1945년 12월에는 [[이승만]]계 단체 [[독립촉성중앙협의회]]에 가담하고 [[신탁통치]] 반대 운동을 전개했으며 한국 YWCA를 다시 재건해 재단 [[이사장]]을 맡았다. 1946년 4월 [[교육부|문교부]]로부터 인가를 받아 이화여자전문학교는 [[전문학교]]에서 [[대학]] 기관으로 승격되며 이화여자대학교가 되었다(한국 최초의 [[종합대학]]).[* 이화여자전문학교 교장이던 김활란은 대학으로 승격된 이화여자대학교 초대 총장을 맡아 1961년까지 재임했다.] 1947년 3월 [[김구]]의 [[한국독립당(1940년)|한국독립당]]이 주도하여 '건국실천원양성소'를 세우자 강사를 맡았는데 건국실천원양성소는 [[우익]] 진영이 전국 각지의 애국 [[청년]]들을 건국 일꾼으로 키운다는 명분을 내걸고 만든 교육 기관이다. 김활란 이외에도 [[이인]], [[조소앙]], [[김학규]], [[지청천]], [[안재홍]], [[신익희]], [[박순천]], [[이은상(시인)|이은상]], [[양주동]], [[정인보]] 등등 강사진이 대단히 화려했는데 매 기수마다 1개월 단기 교육 형태로 운영되던 건국실천원양성소는 1949년 김구가 [[암살]]되면서 자연스레 문을 닫았다. 1948년에는 대한민국의 [[유엔]] 승인을 위한 [[홍보]] 사절로 [[장면]], [[조병옥]], [[김우평]], [[모윤숙]] 등과 함께 유엔에 파견되기도 하였으며 1948년 5월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서 [[서울특별시]] [[서대문구]]에 출마했으나 [[한국민주당]] [[김도연(1894)|김도연]] 후보에 밀려 낙선했다. 1950년 4월 중앙교육위원회 위원에 위촉되었으며 [[6.25 전쟁]] 중이던 1950년 [[공보처]] 제3대 장관을 지내기도 했다. 1952년 1월부터 1954년까지 영자 신문 <코리아타임즈> 사장을 맡았는데 1953년 말에 경영권을 [[장기영(1916)|장기영]] [[조선일보]] 사장에게 넘기고 1954년 장기영이 [[한국일보]]를 창립한 후 사장직도 넘겼다. 1955년 [[대한적십자사]] 부총재를 맡았고 1959년 12월부터 1970년 2월까지 한국 여성 단체 협의회 회장을 지냈다. 1959년 [[한국자유총연맹|한국아시아반공연맹]] 부이사장과 한국여학사협회 회장을 맡았고 1961년 9월 이화여자대학교를 정년 퇴직한 후 명예총장 겸 이화학당 이사장을 맡았으며 1961년 동구학원 이사장에서도 물러났다. 1961년 금란전도협회를 조직해 농촌 기독교 전도 활동을 전개했고 대한기독교교육자 협회 회장, 전국복음화운동 명예회장, 한국기독화운동위원회 위원장 등을 맡았다. 1961년 [[박정희]]에 의하여 [[5.16 군사정변]]이 일어나자 목사 [[한경직]] 등과 더불어 도미하여 당시 [[존 F. 케네디]] 미국 [[대통령]]에게 면담을 요청하며 "한국의 군사 정변을 인정하며 [[군사 정권]]을 지원해달라"는 탄원을 하였다가 [[미국 정부]]에 의하여 자진 출국이라는 형식을 빌려서 강제 출국당하는 수모를 겪기도 하였다. 1963년 8월 교육 부문의 대한민국장을 받았고 [[막사이사이상]]의 공익 부문과 미국 감리회에서 주는 다락방상 등을 수상했다. 평생을 [[독신]]으로 지냈으며[* [[독신주의]]가 마치 [[래디컬 페미니즘]]의 전유물인 줄 아는 사람이 많은데 사실 [[자유주의 페미니즘]]부터 이미 독신주의 성향이 나타났다. 김활란에게는 해당 사항이 없는 이야기지만 [[세속주의]] 성향의 자유주의 페미니스트들은 [[혼인]] 관계에 구속되지 않고 성적 [[쾌락]]을 자유롭게 추구하기 위해서 결혼을 하지 않고 자유로운 [[성관계]]를 즐기는 경우도 있다. 어떠한 경우든 [[남성혐오]]적 동기는 없다는게 중요한 차이다.] 1970년 2월 10일 [[뇌출혈]]로 생을 마감했는데 유언은 “인간의 생명이란 불멸하여 육체가 없어지더라도 죽은 사람이 아니므로 [[장례식]] 대신 화려한 승리의 길로 환송해 주는 환송 [[예배]]를 해주기 바란다.”는 이원론적이고 [[영혼]] 불멸적인 사상이 담긴 유언이었다.[* 기독교에서 죽음은 [[천국]]으로 가는 통과 의례가 아닌 극복의 대상이고 [[플라톤]]적 이원론을 따르지 않기 때문에 이것은 올바른 기독교적 관점이 아니다. 하지만 [[교리]]를 잘 모르고 이원론적으로 생각하는 신자가 적지 않다.] 그리하여 장례식은 대한민국 최초로 [[음악회]]로 치루어졌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