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형석(교육자) (문단 편집) == 생애 == [[1920년]] [[4월 23일]] [[평안북도]] [[운산군]]에서 6남매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이어 [[평안남도]] [[대동군]] 고평면 송산리(現 [[평양시]] [[만경대구역]] 만경대동)으로 이주해 그곳에서 자랐다.[* [[이제 만나러 갑니다(프로그램)|이제 만나러 갑니다]]에 출현하였을 때는 고향을 대동군으로 언급하였는데, 일단 본인은 고향을 대동군으로 인식하는 것으로 보인다.] 아버지가 운산금광에서 일하면서 미국 선교사를 통해 [[기독교]]를 접해 어릴 적부터 교회를 다녔다. 이어 이 지역 보통학교였던 신망학교에 진학했으나, 신망학교는 4학년까지밖에 없어 1931~33년에 창덕학교에서 나머지 과정을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924169540|마치고]] 평양의 미션스쿨인 [[숭실중학교]]에 진학했다. 이곳에서 만주(용정)에서 전학 온 [[윤동주]]와 함께 공부하기도 하였다. 이 무렵 출옥 후 인근에 은거하던 도산 [[안창호]]에게 설교를 듣는 등 가르침을 받았다고 한다.[* [[안창호]]는 오래지 않아 [[1937년]]에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재투옥되었으며, 고문 등으로 건강을 크게 해쳐 [[1938년]]에 사망한다.] 이후 [[신사참배]] 강요를 거부하여 숭실중학교가 강제 폐교되고 '평양 제3공립중학교'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자퇴를 했고 이때 역시 자퇴한 [[윤동주]]는 만주로 돌아간다. 그러나 1년 뒤에 복학하여 5학년 과정을 마쳤다. 이후 소학교에서 1년간 교편을 잡았다가, [[일본]]의 명문사립대 중 하나인 [[조치대학]] 철학과에 진학하여 [[1944년]]에 학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조치대학]]은 [[예수회]]가 세운 사립대학으로, 일본 내에서는 [[와세다대학]], [[게이오기주쿠대학]]과 함께 '[[소케이]]조치(早慶上智)'로 불리는 3대 명문 사학의 위상을 갖고 있다. 역시 [[예수회]]가 설립한 [[서강대학교]]와 여러모로 비슷한 학교이다. [[조치대학]] 졸업 후에는 귀국하여 고향에 있다가 해방을 맞았다. 이후 북한 지역에 [[인민위원회]]가 조직되기 시작하자, 당시로서 매우 드문 대졸자로 참여를 권유받아 [[평안남도]] [[대동군]] [[인민위원회]] 위원을 역임하기도 했다. 이 무렵에 소학교(창덕학교) 선배인 [[김일성]]과도 만났다고 한다. 이 창덕학교는 [[평안남도]] [[대동군]] 용산면 하리 칠골[* 현재 북한에서는 [[평양시]] [[만경대구역]]으로 편입되었다. 이곳은 [[김일성]]의 외가인 신천 강씨 집안 집성촌이 위치한 곳이였다.]에 있던 기독교계 학교였는데, [[김일성]]의 외조부 강돈욱 목사가 학교 설립자 중 한 명이었고 교장을 지낸 바도 있다. 1912년생인 [[김일성]]은 외가와 인연이 깊은 이곳 칠골의 창덕학교를 1923~25년에 다녔다.[* 이후 아버지 [[김형직]]이 체포되면서 다시 만주로 피신한다.] 이들은 연배 차이가 있어 학창 시절에는 만나지 못했다가, [[김일성]]이 1945년 해방 후에 귀국하자 친분이 있던 목사들이 열어준 환영회 자리에서 처음 [[https://www.donga.com/news/Culture/article/all/20170821/85904875/1|만났다]]고 한다. 당시 동네 사람들은 동네 청년 '성주'가 김일성이 되어 지도자감이 되자 크게 놀랐다고 한다. 2021년 영국 [[BBC|BBC방송]] 인터뷰에서 [[https://youtu.be/3qhys0OKsiw|당시 상황에 대한 증언을 하였다.]] 이후 점점 [[인민위원회]]가 다른 권력에 대한 숙청 지향적 행보를 노골적으로 드러내자, 위원직을 사직하고 고향 송산리에 중학교를 설립해 농촌 교육에 나섰다. 하지만 반공 성향의 [[개신교]] 지식인이었던 만큼 감시와 탄압이 계속되었고, 체포가 임박해오자 아내와 첫 아들을 데리고 1947년 8월 20일에 황해도를 통해 월남한다. 그리고 서울에서 1947년 10월부터 [[중앙고등학교]] 교사로 일했다. [[6.25 전쟁]] 정전 후에는 해외유학을 가서 공부를 더 하고 싶었으나, 당시는 전후 혼란기로 해외유학을 가기가 쉽지 않던 상황이었기에 뜻을 접어야 했다고 한다. [[1954년]]에 [[연세대학교]] 초대 총장이었던 [[백낙준]]의 권유로 [[연세대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이후 [[1985년]]에 정년퇴임할 때까지 철학과 교수로 재직한다.[* 한국의 평균 학력이 이렇게 높아진지 얼마 되지 않은만큼 1950년대 당시만 하더라도 석사, 박사학위가 없어도 교수를 지내는 경우가 굉장히 많았다.] 정년퇴임한 이후에도 [age(1920-04-23)]세를 넘긴 20[age(2000-01-01)]년 현재까지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