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현구 (문단 편집) ==== 최재석 연구의 학문적 문제 ==== [[왜]]를 백제의 식민지로 볼 근거는 문헌으로나 고고학적으로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일본서기나 그 외에 유물, 유적을 보면 백제가 왜에 문화적으로 영향을 미친 근거는 있어도 그게 곧 정치적으로 백제가 왜를 지배했다는 근거는 아니다. 그런 논리라면 중국 쪽에서 유불도를 들여온 한국의 고대국가들도 식민지 라는 [[동북공정]]급 논리가 된다. 최재석 교수의 주장은 확대 해석의 여지가 있다. 왜가 백제의 식민지였다면 『삼국사기』에서는 뭐하러 백제가 왜에 왕자를 질(質)로 보냈다는 기록이 있는가? 김현구 교수가 [[삼국사기]]같은 기본사료도 검증 안 했을까? 백제가 바다 건너 왜를 마음대로 움직일 정도로 강했다면 진작에 가야나 신라는 멸망시켰다. 그러나 실제로는 전라도 남부 일대에 대한 완전한 지배권 조차도 [[동성왕]]~[[무령왕]] 대 즈음에야 확보했다. 모순 되는 것. 당시 왜가 소국이었다고 하더라도 바다 너머에 있었다. 이를 유지할 힘이 백제에게 있었다면 왜 굳이 영산강 유역을 영역화하는 것도 6세기 이후에야 달성했는지 모를 일. 그리고 왜는 오래전부터 중국과 교류를 했고 견수사와 견당사도 파견하기도 했다. 왜가 백제의 식민지였다면 이렇게 백제를 의식하지 않고 중국과 교류를 하는 것도 힘들고 무엇보다 '''중국 측이 왜가 백제의 식민지 내지는 지배당하는 나라였다는 사실을 몰랐을 리 없다. 그러나 중국 측의 기록에서조차 이를 알려주는 기록은 없다.''' 당연히 고대사를 전문으로 연구한 박사가 이런 걸 모를 리는 없다. 더욱 자세한 건 다음 서적을 참고하면 좋다. * 연민수, "고대한일관계사" * 구태훈, "일본고대중세사" * 일본사학회, "아틀란스 일본사" 그리고 '''최재석 교수는 [[삼국사기]]를 자기한테만 유리한 기록만 취사선택한다.''' '''백제 신라가 동맹이였을 때 왜가 신라를 공격했다는 기록이 있다.'''백제의 직할령 식민지가 본국을 무시하고 공격했다는건가? 아니면 [[삼국사기]]에서 이런 부분만 믿을 수 없다는 건가? 삼국사기 직접 인용해보자. >(내해이사금) 13년(삼국사기 208) 봄 2월, 서쪽의 군읍(郡邑)을 두루 돌아보고 열흘이 되어서 돌아왔다. >여름 4월, 왜인이 변경을 침범하였으므로 이벌찬 이음을 보내 병사를 거느려 막게 하였다. >十三年 春二月 西巡郡邑 浹旬而返 夏四月 倭人犯境 遣伊伐飡利音 將兵拒之 >(조분이사금) 3년(삼국사기 232) 여름 4월, 왜인이 갑자기 쳐들어와 금성을 에워쌌다. 임금이 몸소 나가 싸우니 적이 흩어져 도망하였다. 날랜 기병을 보내어 그들을 추격하여 천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三年, 夏四月, 倭人猝至圍金城. 王親出戰, 賊潰走. 遣輕騎追擊之, 殺獲一千餘級 >(조분이사금) 4년(삼국사기 233) 여름 4월, 큰 바람이 불어 지붕의 기와를 날렸다. >5월, 왜의 병사가 동쪽 변경을 노략질하였다. >가을 7월, 이찬 우로가 왜인과 사도(沙道)에서 싸웠다. 바람을 이용하여 불을 질러 배를 불태우니, 적들이 물에 뛰어들어 모두 죽었다. >四年 夏四月 大風飛屋瓦 五月 倭兵寇東邊 秋七月 伊飡于老與倭人戰沙道 乘風縱火焚舟 賊赴水死盡 >(유례이사금) 4년(삼국사기 287) 여름 4월, 왜인이 일례부(一禮部)를 습격하여 불을 지르고는 백성 1천 명을 붙잡아갔다. >四年 夏四月 倭人襲一禮部 縱火燒之 虜人一千而去 >(유례이사금) 6년(삼국사기 289) 여름 5월, 왜의 병사가 쳐들어온다는 소문이 있어, 배와 노를 수리하고 갑옷과 무기를 손질하였다. >六年 夏五月 聞倭兵至 理舟楫 繕甲兵 >(유례이사금) 9년(삼국사기 292) 여름 6월, 왜의 병사가 사도성(沙道城)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일길찬 대곡(大谷)에게 명하여 병사를 거느리고 가서 구원하고 지키도록 하였다. >가을 7월, 가뭄이 들었고, 메뚜기떼의 재해가 있었다. >九年 夏六月 倭兵攻陷沙道城 命一吉飡大谷 領兵救完之 秋七月 旱 蝗 >(유례이사금) 12년(삼국사기 295) 봄, 임금이 신하들에게 말하였다. > “왜인이 자주 우리의 성읍(城邑)을 침범하여 백성들이 편히 살 수가 없다. 나는 백제와 도모하여 일시에 바다를 건너 그 나라를 공격하고자 하는데 어떠한가?” >서불한 홍권이 대답하였다. > “우리나라 사람은 물에서의 싸움은 익숙하지 않은데, 위험을 무릅쓰고 멀리까지 가서 정벌한다면 뜻하지 않은 위험이 있을까 걱정스럽습니다. 하물며 백제는 거짓이 많고 늘 우리나라를 집어 삼키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으니 또한 함께 도모하기는 어려울 듯합니다.” >임금이 ‘옳다’고 하였다. >十二年春 王謂臣下曰 倭人屢犯我城邑 百姓不得安居 吾欲與百濟謀 一時浮海 入擊其國 如何舒弗邯弘權對曰 吾人不習水戰 冒險遠征 恐有不測之危 況百濟多詐 常有呑噬我國之心 亦恐難與同謀 王曰 善 >(흘해이사금) 36년(삼국사기 345) 봄 정월, 강세(康世)를 이벌찬으로 삼았다. >2월, 왜왕이 글을 보내와 국교를 끊자고 하였다. >三十六年 春正月 拜康世爲伊伐飡 二月 倭王移書絶交 >(흘해이사금) 37년(삼국사기 346), 왜의 병사가 갑자기 풍도(風島)에 이르러 변방의 민가를 노략질하였다. 또 진군하여 금성을 포위하고 급하게 공격하였다. 임금이 병사를 내어 싸우고자 하자 이벌찬 강세가 말하였다. >“적은 멀리서 왔습니다. 그들의 날카로운 기세를 당해낼 수가 없으면 공격을 늦추어 그 병사들이 피로해지기를 기다리는 것만 못합니다.” >임금이 그렇다고 여겨 성문을 닫고 나가지 않았다. 적들이 식량이 떨어져 물러가려 하니, 강세에게 명하여 날쌘 기병을 이끌고 추격하도록 하여 쫓아버렸다. >三十七年 倭兵猝至風島 抄掠邊戶 又進圍金城急攻 王欲出兵相戰 伊伐飡康世曰 賊遠至 其鋒不可當 不若緩之 待其師老 王然之 閉門不出 賊食盡將退 命康世率勁騎追擊 走之 >(내물이사금) 9년(삼국사기 364) 여름 4월에 왜병(倭兵)이 대거 이르렀다. 왕이 이를 듣고 대적할 수 없을 것을 두려워하여, 풀로 허수아비 수천 개를 만들어 옷을 입히고 무기를 들려서 토함산(吐含山) 아래에 나란히 세워두고, 용맹한 군사 1,000명을 부현(斧峴)의 동쪽 들판에 매복시켰다. 왜인(倭人)이 무리가 많음을 믿고 바로 나아가니, 매복한 군사가 일어나 불의에 공격하였다. 왜인이 대패하여 달아나자 추격하여 그들을 거의 다 죽였다. >九年, 夏四月, 倭兵大至,王聞之, 恐不可敵, 造草偶人數千. 衣衣持兵, 列立吐含山下, 伏勇士一千於斧峴東原. 倭人恃衆直進, 伏發擊其不意. 倭人大敗走, 追擊殺之幾盡 >(내물이사금) 38년(삼국사기 393) 여름 5월, 왜인이 와서 금성(金城)을 포위하고 닷새 동안 풀지 않았다. 장수와 병사들이 모두 나가 싸우기를 청하였다. 임금이 말하였다. >“지금 적들은 배를 버리고 육지에 깊숙이 들어와 죽기로 기를 쓰고 있으니 그 날카로운 기세를 당할 수 없다.” >그리고 성문을 닫았다. >적이 아무 성과 없이 물러가자 임금이 용맹한 기병 2백 명을 먼저 보내 돌아가는 길을 막게 하고, 보병 1천 명을 또 보냈다. 독산(獨山)까지 따라가서 양쪽에서 도와 공격하여 크게 쳐부수었다. 죽이거나 사로잡은 자가 매우 많았다. >三十八年 夏五月 倭人來圍金城 五日不解 將士皆請出戰 王曰 今賊棄舟深入 在於死地 鋒不可當 乃閉城門 賊無功而退 王先遣勇騎二百 遮其歸路 又遣步卒一千 追於獨山 夾擊大敗之 殺獲甚衆 >(실성이사금) 4년(삼국사기 405) 여름 4월, 왜의 병사들이 명활성(明活城)을 공격해왔다. 그들이 이기지 못하고 돌아가자, 임금이 기병을 이끌고 독산(獨山)의 남쪽 길목에서 요격하였고, 다시 싸워서 그들을 깨뜨리고 3백여 명을 죽였다. >四年 夏四月 倭兵來攻明活城 不克而歸 王率騎兵 要之獨山之南 再戰破之 殺獲三百餘級 ~~'''[[신라]] [[호구(유행어)|호구]]설'''. "백제의 식민지"가 자기들을 공격하는데 정작 백제와 동맹을 맺는다.~~ '''군사적으로 맞지 않고 중국사료에 대한 기본 조사도 없고 증거도 없는 상태에서 [[삼국사기]]도 반대사실들을 완전 무시하는 등, 기본도 되어있지 않은 논문을 통과시켜줄 수 있을 리가 없다.''' 학술논문에서 학술적 이유는 당연히 첫 번째다. 이것에 대해 "김현구가 저런 학술적 이유로 거부했다는 증거가 없다"는 주장이 있는데 '''이건 [[악마의 증명]]이다'''. 그리고 논문 심사거부의 타당성 여부는 학술적 이유에 따른 것이다. 해당 논문 개제 요청자의 학술적 문제점을 지적한 것으로도 "논문 거부의 타당성"은 충족된다. [[악마의 증명]]을 할 이유가 없다. [삼국사기는 삼국사기고 일본서기는 서기인가? 서기를 모두 일본서기로 바꾸었음]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