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현구 (문단 편집) ==== 왜에 대한 이덕일의 주장 겸 왜곡: "왜'''는 가라, 신라, 백제를 지배했고 고구려와 패권 경쟁'''" ==== 오히려 "왜가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는 주장은 [[이덕일]]이 했다. '''이덕일은 "한반도에 있었던 왜는 백제와 신라를 영향력 아래 두고 고구려의 남하 정책에 맞서 싸웠던 강력한 정치 집단"이었다가 고구려한테 밀려서 열도로 이주했다는 주장을 했다. 이덕일은, '''원래 왜는 한반도 지역 국가이고 [[신라]], [[백제]], [[가라]]를 지배했는데[[고구려]]한테 패권 경쟁에 패배해서 열도로 이주했다'''는 괴상한 주장을 한 적이 있고 이걸 대중교양서에 써서내기도 했다. >왜의 위치는 광개토대왕 비문의 기사에서도 큰 논란거리였다. 한일 양국 사이에 수십 년에 걸쳐 논쟁의 대상이 되었던 유명한 신묘년(광개토왕1년: 백제 진사왕 7년:신라 내물왕 36년: 391) 기사를 보자. ><왜가 신묘년 이래 바다를 건너와서 □□과 신라를 신민으로 삼았다.(而倭以辛卯年來 渡海 破百殘□□新羅 以爲臣民) -광개토대왕 비문, 신묘년 조> >왜가 한반도 내에 있었다는 관점에서 바라볼 때 '바다를 건너와서'라는 구절이 문제가 되지만 광개토대왕 비문은 마모가 심해 해자와 도자의 자획히 분명치 않다는 문제 제기가 일찍부터 있어 왔다. 또한 바다를 건넌 주체 세력이 누구냐는 문제도 여러 차례 제기되었다.-(222~224) >그런데 왜가 이 무렵 신라를 공격한 기사는 삼국사기에서도 찾을 수 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내물왕 38년(393)에는 "5월에 왜인이 금성을 에워싸 5일 동안 풀지 않았다"는 기록이 나온다. 장수가 나가서 싸우기를 청하자 내물왕은 "지금 적이 배를 버리고 깊이 들어와 사지에 있으므로 그 봉을 당하기 어렵다."하고. 이에 성문을 굳게 닫았는데, 왜군이 물러가자 왕이 기병과 보병을 보내 습격했다는 내용이다. 이 때는 문제의 신묘년 2년 후다. 광개토대왕 비문에서 왜가 백제와 신라를 공격했다고 기록한 이 무렵 삼국사기도 왜가 신라의 금성, 즉 서울을 포위하고 위협했던 상황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최근의 일본사 연구자들은 신묘년. 즉 4세기 후반 일본은 통일된 정권을 형성하지 못하고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 즉 4세기 후반에 일본열도에서 바다를 건너와 백제와 신라를 공격할 정도의 정치세력은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 일본 학계의 연구 결과다. 이에 따르면 일본열도에는 현해탄을 건너 신라를 공격할 만한 능력을 가진 정치세력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럼 광개토대왕 비문이나 삼국사기의 여러 기록들에 나오는 왜의 실체는 무엇일까? 삼국사기의 기록에 따르더라도 왜는 한반도 정세에 여러 차례 현실적 영향력을 행사한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아신왕 6년(397)에 "왕이 왜국과 우호 관계를 맺고 태자 진지를 인질로 보냈는 기사내용과, 신라본기 실성왕 1년(402) 3월에 "왜국과 우호 관계를 맺고, 내물왕의 아들 미사혼을 인질로 보냈다"는 기사는 '''당시 왜가 백제와 신라를 자신의 영향력 아래 두었던 강력한 정치집단임을 보여주는 것이다.…한반도에 있었던 왜는 백제와 신라를 영향력 아래 두고 고구려의 남하정책에 맞서싸웠던 강력한 정치집단이었다.''' -이덕일, 교양한국사1, 2005, 휴머니스트224~225 >다음 해인 영락 10년(400)광개토대왕 비문 기사는 광개토대왕이 대규모의 군사를 보내 왜군을 물리쳤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 기사는 내물왕의 지원 요청에 따라 광개토대왕이 5만의 군사를 보내 신라를 침입한 왜군을 공격하는 내용이다. '''고구려군에 쫓긴 왜군이 도망간 지역이 임나가라인 점은 임나일본부와 관련해 흥미로운 대목이다. 이 당시 임나가라가 왜의 강력한 영향력 아래 있었음을 시사해 주기 때문이다'''. 광개토대왕이 보낸 군사가 무려 5만에 달하는 것은 다소 과장일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이 정도의 군사는 보내야 물리칠 수 있었던 강적이 왜였음을 말해준다.…… 고구려에 맞서 한반도의 패권을 다투던 왜국'''은, 이렇듯 광개토대왕 비문에 따르면 400년에 남하한 고구려군에 타격을 받은 후 진열을 재정비해 404년 고구려의 대방 지역을 선제 공격하다가 또 다시 패배를 당했다. 두 번의 걸친 패배로 왜국의 국력은 약화되지만 여전히 신라왕이 선왕의 아들을 인질로 보내야 할 정도의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405년 삼국사기 신라본기 실성왕 4년조는 "왜병이 와서 명활성을 치다가 이기지 못하고 돌아가매, 왕이 기병을 이끌고 독산 남 에서 이를 요격하여 두 번 싸워 파 하고 300여 성을 살획했다."는 기사가 나오는데 고구려 대방 지역을 공격한 왜가 1년 후에는 다시 신라를 공격했던 것이다. 이런 모든 공격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한반도에서 그 영향력이 약하되어 가던 왜는 5세기 경 일본열도로 이주를 시작하는 것으로 추측된다. 이는 이 무렵부터 일본 나라 지역에 거대한 고분들이 조성되는 것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렇게 일본열도로 이주하던 왜는 500년 무렵 그 중심 세력의 대부분이 이주를 마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500년(신라 소지왕 22년) 3월 장봉진을 공격한 왜인을 끝으로 삼국사기는 왜인에 대한 기록을 하지 않고 있다. -이덕일, 교양한국사1, 2005, 휴머니스트 227~229 이덕일은 김석형 과 [[김현구]]등이 박살 낸 '''[[임나일본부설]]을 살렸을 뿐만 아니라 왜가 [[백제]]와 [[신라]]까지 지배하며 고구려와 한반도 패권을 경쟁'''하다 밀리니깐 열도로 이주했다는 왜곡을 벌였다. 이덕일이 쓴 책인 고구려 700년의 수수께끼에서 [[http://cafe.naver.com/booheong/102962|이런 지도가 쓰였다.]] 잘보면 [[:파일:attachment/이덕일/임나.png|남부쪽에 왜 라는 지역이 있다!]] 자세한 건''' [[이덕일/비판]]문서 참고하자. 일본의 '왜의 한반도 남부 지배설'에서 [[내선일체]]스러운 사상까지 더해졌다.~~[[내선일체]]에 영향받은 [[환단고기]] 위서사실을 부정하는 사람답다.~~ 물론 '''왜의 한반도 남부 지배설은 북한 학자 김석형과 한국 학자 김현구가 예전에 반박했다.''' '''"왜가 가야, 백제, 신라 를 지배하고 고구려와 패권 경쟁을 했다"고 왜곡하는 인간이 "임나일본부설은 말이 안 된다"고 말한 학자를 임나일본부설로 몰고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