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품일 (문단 편집) == 생애 == 660년 [[황산벌 전투]]에서 [[김유신]], [[김흠순]] 등과 참전했는데 [[계백]]이 이끄는 백제군 결사대에 막혀 사비성 진입이 늦춰질 상황에 처했고, 몇 차례의 작은 패배로 신라군의 사기가 땅에 떨어졌다. 신라군 사령부는 어린 [[화랑]]을 선봉에 앞세워 신라군의 전의를 불태울 것을 결정했고, 김품일은 자신의 부장으로 참전한 아들 관창에게 "네가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 뜻과 기개가 있다. 오늘이야말로 공명을 세워 부귀를 얻을 때이니 어찌 용기가 없겠느냐?"라고 말하며 16살인 어린 아들을 적진으로 보냈다. 참고로 창작물에서는 관창 혼자 돌격하는 것으로 묘사하는 경우가 많은데 '적군은 많고 아군은 적었기 때문에(而彼衆我寡)'라는 삼국사기의 구절을 보면 상대적으로 적긴 해도 혼자 보낸 것은 아니다. 임무 자체도 막연히 사기 진작을 위한 자살돌격이 아니라 적의 주의를 끄는 별동대 임무였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결국 아들 [[김관창|관창]]은 [[계백]]에게 2번 사로잡혀 죽임을 당했고 신라군은 어린 화랑의 용맹에 기세가 올라 백제군을 무찌르고 [[계백]]은 전사, [[충상]], [[상영]] 등을 붙잡아 승리했고 사비성과 웅진성으로 진격해 [[의자왕]]의 항복을 받아 [[백제]]를 멸망시켰다. 김품일은 이후 [[백제부흥운동|백제부흥군]] 토벌에 참전했으나 두량윤성 전투에서 패배했다. 무열왕은 여러 장수들이 전투에서 패배한 책임을 묻되, 정도에 따라 차등있게 벌을 주었다고 하는데 이때 징계를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백제부흥군이 진압된 후에는 고구려 전선에 배치돼 664년 [[김인문(신라)|김인문]], [[김문영]] 등과 함께 고구려의 돌사성을 빼앗았고, 670년 [[나당전쟁]]이 개전하자 문무왕은 품일을 비롯한 장수들에게 백제(당시 [[당나라]]의 [[꼭두각시]]인 [[웅진도독부]])를 공격해 성 63곳을 빼앗고 그곳의 사람들을 후방으로 옮기도록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