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추자 (문단 편집) === 데뷔 및 활동 === 그렇게 대학교에 진학하였으나 입학과 동시에 [[신중현]]의 눈에 띄어 [[1969년]] 늦기 전에, [[월남에서 돌아온 김상사]] 등의 곡을 수록한 1집을 발표하여 가수활동을 시작하게 된다. 정확히 말하면, 신중현의 매니저와 김추자의 형부가 친한 사이었는데, 형부가 다리를 놔줘서 김추자가 [[신중현]]의 사무실에 찾아가게 되었고, 노래를 들어본 신중현이 곡을 하나 던져주는데, 그게 바로 데뷔곡인 '늦기 전에'. 신중현 씨의 회고에는 당시 스타 가수였던 김상희의 녹음을 봐주느라 정신이 없는데도 며칠을 하루종일 와서 기다려서, 한번 테스트를 해보고 의외로 쓸만한 재목이겠다 싶어서 늦기 전에를 주었다고 한다. 이후 [[님은 먼 곳에(노래)|님은 먼 곳에]] (1970), [[거짓말이야]] (1971) 등 히트곡을 내놓으며 김추자는 센세이셔널한 인기를 누리게 된다. 큰 키에 육감적인 몸매, 화려한 무대, 그리고 그 당시로서는 파격적이었던 몸에 쫙 달라붙는 옷을 입고 공연을 하던 그녀의 모습은 많은 남성들을 매혹하게 만들기 충분했으며, 당시 유행했던 담배인 청자와 더불어 "담배는 청자, 노래는 추자"라는 말을 탄생시키기에 이르렀다. 김추자는 데뷔 이후 [[동양방송]], [[문화방송]], [[KBS]] 등 당시 방송 3사에 전부 출연하며 얼굴을 알렸다. 당시 [[선우영아]], [[김상희(가수)|김상희]], [[이미자]], [[정훈희]], [[문정선]], [[최희준]], [[배호]], [[나훈아]] 등과 출연하여 음악의 자웅을 겨루기도 했다. 당시 취입한 님은 먼 곳에는 충무로에서 모든 영화감독이 타이틀로 넣으려고 경매입찰까지 일어났고, 당시 음반 타이틀 매매로는 사상 최고가인 50만원을 달성하기도 했다.[* 당시 19공탄 100장의 도매가가 2천원 수준이었다.] 살인적인 전국 스케줄에 방송을 여러번 빼먹은 탓에 KBS와 가수협회로터 출연정지 징계를 받기도 했고, 하기한 소주병 테러로 얼굴이 찢어지기도 했으나 재기에 성공했고, 1972년 MBC 10대가수가요제에서 특별상 수상을 받기도 했다. MBC에서 수상한 뒤에는 MBC에 주로 출연했고, 데뷔한 지 3년만에 김추자 단독 방송까지 편성되는 등 인기의 절정을 누렸다. 1973년부터는 [[동양방송|TBC]]에 다시 출연하기 시작했는데, 당시 최정상급 프로그램인 [[쇼쇼쇼]]에 자주 나오게 된다. 이 당시 김추자는 이미 자신만의 색을 철저하게 구축하는 데 완성했고, 무대와 연출 등 다른 가수들과는 차별화된 모습으로 시청자들을 사로잡았다. 당시 음악방송은 가수가 가운데에 서서 노래를 부르고 모서리에는 지휘자의 지휘 아래 방송악단이 반주를 하는 일률적인 모습이었는데, 김추자는 넓은 세트장을 자유자재로 쓸 줄 아는 사람이었고, 당시 가장 우수한 방송 인력들이 모인 TBC와 시너지를 일으켜 방송이 아닌 하나의 공연이자 연극을 기획하기에 이른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